고려 여성의 삶
- 최초 등록일
- 2013.10.24
- 최종 저작일
- 20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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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염경애 묘지명
2) 일부다처제 vs 일부일처제
3) 서류부가혼(처가살이)
4) 양측적 친속관계
5) 여성의 사회적지위
본문내용
1) 염경애 묘지명
소재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신5834)
연대 의종 2년(1148)
황통(皇統) 6년 병인(인종 24, 1146) 정월 28일 무술일에 한남(漢南) 최루백(崔婁伯)의 처 봉성현군(峯城縣君) 염씨(廉氏)가 마을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순천원(順天院)에 빈소(殯所)를 마련하였다가 2월 임인일에 서울 북쪽 박혈(朴穴)의 서북쪽 산등성이에서 화장하였다. 유골을 봉하여 임시로 서울 동쪽에 있는 청량사(淸凉寺)에 모셔두었다가, 3년이 되는 무진년(의종 2, 1148) 8월 17일에 인효원(因孝院) 동북쪽에 장례지내니, 아내의 아버지 묘소 곁이다. 루백이 다음과 같이 묘지(墓誌)를 짓는다.
아내의 이름은 경애(瓊愛)로, 검교상서우복야 대부소경(檢校尙書右僕射 大府少卿) 염덕방(廉德方)공의 딸이고, 어머니는 의령군대부인(宜寧郡大夫人) 심씨(沈氏)이다. 아내는 25세에 나에게 시집 와서 여섯 명의 자녀를 낳았다. 장남은 단인(端仁)이고, 2남은 단의(端義)이고, 3남은 단례(端禮)인데, 모두 학문에 뜻을 두었고, 4남 단지(端智)는 출가하여 중이 되었다. 장녀 귀강(貴姜)은 흥위위녹사(興威衛錄事) 최국보(崔國輔)에게 시집갔는데 최씨가 죽자 집에 돌아와 있고, 2녀 순강(順姜)은 아직 어리다.
아내는 사람됨이 아름답고 조심스럽고 정숙하였다. 자못 문자(文字)를 알아 대의(大義)에 밝았고 말씨와 용모, 일솜씨와 행동이 남보다 뛰어났다. 출가하기 전에는 부모를 잘 섬겼고, 시집온 뒤에는 아내의 도리를 부지런히 하였으며, 어른의 뜻을 먼저 알아 하고자 하는 그 뜻을 받들었다. 돌아가신 우리 어머님을 효성으로 봉양하였고, 안팎 친척의 좋은 일과 언짢은 일, 경사스러운 일과 불행한 일에는 다 그 마음을 함께 하였으니, 이로써 훌륭하다고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