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고급-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및 개화기 문화와 독립투쟁
- 최초 등록일
- 2019.01.30
- 최종 저작일
- 20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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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이끌 지도자와 단체가 필요하다고 인식 한 독립 운동가들이국내 외 여러 임시정부를 통합하여, 1919년 4월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를 흡수
*국내 각지에 있던 임시정부: 1919.3 대한국민의회 (대통령-손병희, 부통령-박영효, 국무총리-이승만)
1919.4 한성 정부 (집정관 총재:이승만, 국무총리 총제:이동휘)
1919.4 상하이 임시정부 (국무총리:이승만, 내무총장:안창호, 군무총장:이동휘)
-지도부: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선출.
-삼권 분립(임시 의정원, 국무원, 법원)에 기초한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 공화제 정부
-독립운동을 지휘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함.
-독립군을 양성하고 한국광복군을 조직.
-파리 강화 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여 독립 청원서를 제출하고, 각국 대표단에게 일제의 불법성과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기 위해 노력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
-연통제와 교통국을 조직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고 국내와 연락망을 구축.
1923년 국민대표 회의개최
-연통제,교통국 조직이 붕괴되고 외교중심 독립운동의 한계가 드러나자, 독립운동 방법론을 둘러싼 민족 운동가들의 갈등이 심화되었으며,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서 제출에 대한 거센 비판이 일어났던 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새로운 진로에 대해서 창조파(신채호 중심)와 개조파(안창호 중심)으로 나뉘며 대립하게 되면서 회의가 결렬되고,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탈하는 결과를 안은 채, 임시정부가 침체 위기를 겪게 됨.
1925년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원의 책임을 물어 이승만이 탄핵되고, 박은식이 대통령으로 취임되면서, 국무령 중심의 내각 책임제로 개편되어짐.
1930년대
김구가 한인애국단을 조직(1931)- 이봉창,윤봉길의 의거(1932년)로 침체되었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만보산사건으로 주춤했던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다시 받게 되었고, 이후 중일전쟁(1937)으로 인하여 상하이를 떠나 이동하게 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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