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정선의 금강내산과 단발령금강 비교 분석
목차
Ⅰ. 머리말
Ⅱ. 金剛內山과 斷髮嶺望金剛
Ⅲ.『金剛內山』과『斷髮嶺望金剛』의 作品 分析
Ⅳ. 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정치적?사회적 안정기를 맞은 조선 후기는 문화적, 예술적인 면에서 새로운 취향과 사조를 추구하게 되었다. 중국으로부터 각종 畵譜와 眞鷹作이 유통되면서 남종화풍이 크게 성하게 되었으며, 風俗畵와 眞景山水畵와 같은 새로운 성격의 그림들이 ?法으로 그려지기 시작하였다.1) 그중 우리나라 名所를 독특한 화법으로 그린 산수화를 진경산수화라 부르고 있다.
金剛山圖는 진경산수화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謙齋 鄭敾(1676-1759)의 진경산수화는 조선 후기의 새로운 가치관과 예술관을 회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정선의 진경 산수는 대략 3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기는 30대에서 50대 전반까지로 궁중을 중심으로 벼슬살이를 하면서 작품활동을 한 시기이다. 제 2기는 50대 후반부터 60대말까지로 화풍이 완성된 시기로 文士들과 폭 넓은 詩畵교우를 가지고 주변의 명승지를 사경했던 시기이다. 제3기는 70-80대로 화풍이 완숙기에 접어들면서 영조로부터 長壽의 예우를 받는 시기이다.
본 글에서는 2012년 간송미술관에서 전시한 정선의 작품 중 정선의 제3기에 해당하는 단발령에서 금강산을 바라보는 작품인 『金剛內山』과 『斷髮嶺望金剛』을 중심으로 작품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두 작품은 혼잡한 전시장에서도 나의 시선을 고정시켰던 것이다. 호분의 사용이 자칫 하면 탁해 보일 수 있는데, 금강산의 암봉이 수정처럼 보이게 했다. 세월에 흘러 조금은 호분의 갈라짐과 박락이 있지만, 신비스러운 작품이다. 다음은 두 작품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Ⅱ. 金剛內山과 斷髮嶺望金剛2)
『금강내산』과 『단발령망금강』은 『海嶽傳神帖』안에 합장(合裝)된 21면의 그림 중 한 폭이다. 겸재는 숙종 37년(1711)신묘에 36세의 한창 나이로 단금(斷金)의 벗인 진경시(眞景詩)의 대가 사천(?川) 이병연(李秉淵, 1681~1751)이 금강산 초입의 금화현감으로 나가 있는 기회에 사천의 초청을 받아 스승인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선생을 모시고 금강산을 여행하게 되었다. 이때 삼연과 사천은 진경시로 금강산을 사생하고 겸재는 진경산수화로 금강산을 사생하여 이를 합장하고『해악전신첩』이라 이름 지었는데 이 시화첩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겸재는 일약 국중 제일 명화가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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