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머리말
2. 원주 원씨 가문의 起家
3. 원관의 가계
4. 원경의 가계
5. 맺음말
본문내용
江原道 남서부에 위치한 행정중심지 原州 지역의 土姓은 元·李·安·申·金·石氏 등이다. 원주는 江陵과 함께 江原道의 2大邑으로 고려 초기부터 土姓勢가 강하였다. 원주 토성 가운데 元․李․安氏가 고려 전기에 토성으로 성장하였다. 弓裔에 의해 정복된 梁吉은 원주 출신으로 한때 원주를 거점으로 부근 30여성을 점유하여 강력한 세력으로 존재하였다.
『世宗實錄地理志』소재 토성으로서의 원씨는 原州, 安岳 두 本貫 뿐이며 고려 시대 官人을 배출하며 世族으로 성장한 가문은 三韓功臣 元克猷의 원주 원씨 가계이다.
원씨는 계보를 달리하는 耘谷系(시조 : 元鏡), 侍中公系(시조 : 元益謙), 原城伯系(시조 : 元克猷), 忠肅公系(시조 : 元沖甲, 原城伯系와 合譜됨)의 네 파로 나뉘어져 있다.
원주 지역을 在地 基盤으로 했던 耘谷․侍中公系의 가계와 통혼권에 대해서는 박진훈 교수의 精緻한 선행 연구가 있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羅末麗初에 중앙 정계에 진출하고 대대로 仕宦하면서 세족 가문으로 성장한 原城伯系에 대해서 고찰하고자 한다.
원극유의 원주 원씨 가문은 원 간섭기의 특색이 가장 잘 드러난 충선왕~충정왕 시기에 世族으로 浮上하여 여러 유력 가문들과 통혼했다. 또한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도 成俔(1439~1504)이『慵齋叢話』에서 열거한 당대의「名門鉅族」인 75개 姓貫에 포함되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원주 원씨 가문의 起家 과정과 정치적 浮沈 등을 살피고자 한다.
고려 후기 원부, 원관, 원충, 원선지의 묘지명이 전하여 가문의 번성함을 시사하고 있다. 墓誌銘과 文集類 등을 통해서 史書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인물의 행적, 생존연대, 통혼권 등 여러 사항들을 확인할 수 있다.
원주 원씨 가문은 成俔이 제시한 당대의「名門鉅族」인 75개의 姓貫에 포함되었다. 고려 후기 世族에서 조선 초기 鉅族으로 移行하였던 기타 여러 개별 가문들에 대해서도 더욱 세부적이고 입체적인 고찰이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이를 위해서 묘지명 및 문집류들을 더욱 확충하여 개별 인물들의 행적과 상호 관계 등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연구 과정이 선행된다면 개별 가문과 가계의 성향을 한층 더 심층적으로 考究할 수 있으리라 판단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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