仁村 金性洙의 친일 논란에 관한 이중적 평가
- 최초 등록일
- 2016.01.11
- 최종 저작일
- 20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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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I. 서론
II. 본론
1. 김성수의 성장배경과 업적
2. 인촌의 친일 논란 행적과 행위
1) 중일전쟁 발발 이후 시국강연 활동
2) 관제단체 간부 활동
3) 학병 지원 격려 활동
3. 친일 논란에 대한 평가와 분석
1)진보학계와 보수학계의 논의
2)친일이란 무엇인가?
III. 결론
본문내용
I. 서론
‘친일(親日)’의 기준은 무엇일까? 그동안의 학계는 이분법적으로 애국지사와 친일을 나누고자 하였다. 안중근과 같은 애국지사도 있고, 이완용과 같은 친일 매국노가 있다면 그 사이에는 그 행적의 구분이 모호한 인물들이 있다. 그들은 분명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기초와 반일에 노력을 기울였지만, 한편으로는 업적들 중 일부가 친일이라 의심받기도 한다.
인촌 김성수는 그러한 이분법적 논란을 가장 잘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이다. 그는 민족을 위해 많은 대외적 활동을 하였다. 민족운동의 실천, 언론창달, 신간화의 애국운동참여는 물론 현 고려대학교인 안암골의 웅자로 시작된 인재육성에 기여하기도 했다. 또한 김성수는 일제하 동아일보 의 최대주주이자 실질적 소유주으며, 1932년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한 뒤 교장으로서 학교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또 등 기업 활동도 빼 놓을 수 없다 게다가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부통령을 역임했고 그의 장례식은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한마디로 말해서 민족언론, 민족교육, 민족기업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추앙받고 있다.
반면에 해방 직후부터 현재까지 일제 말기의 행적을 놓고 친일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1945년 9월 좌익이 김성수의 학병 기고문과 해방이후 여운형의 연설문 등을 수록한 라는 문 팜플 Traitors and Patriot 팜플렛을 미군기관에 뿌렸다는 주장이 최초다. 1947년 7월에는 학병 출신의 김상훈이 김성수를 친일파 민족반역자 학병의 원수, 영원한 인민의 적 으로 규정하고 매일신보 기고 등 일제하 김성수의 주요 행위를 열거했다. 한편 민족정경연구소가 낸 친일파군상 에서는 김성수를 피동적으로 끌려서 활동하는 체 한 자 에 포함시키고 이를 “다시 경찰의 박해를 면하고 신변의 안전 또는 지위 사업 등의 유지위해 부득이 끌려다닌 자" 로 정리했다.
이러한 판단은 학계를 중심으로 한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親日人名辭典)의 등재로 현실화 되었고, 정부기관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서에도 등재됨으로써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 되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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