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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정보
ㆍ발행기관 : 동국사학회
ㆍ수록지정보 : 동국사학 / 61권
ㆍ저자명 : 정태희
ㆍ저자명 : 정태희
목차
Ⅰ. 서론Ⅱ. 모릴 관세법 제정
Ⅲ. 모릴 관세법에 대한 영국의 인식
Ⅳ. 남북전쟁 전후 관세에 대한 남부인의 입장과 비전
Ⅴ. 결론
한국어 초록
이 글은 남북전쟁 이전 연방정부의 관세가 편파적으로 북부위주의 재정지출로이어짐으로써 고조되는 남부인들의 피해의식이 결국 연방탈퇴를 가져왔으며, 독
자적인 남부연합을 통하여 남부의 경제발전을 도모하려는 남부 엘리트들의 비전
을 고찰한다. 또한 남북전쟁 초기 모릴관세에 대하여 제3자적 시각이라 할 수 있
는 영국인의 관세관을 살펴봄으로써 미 연방의 보호관세가 남북전쟁의 원인으로
작용했음을 살펴볼 수 있다.
남부의 미 연방 탈퇴 원인은 노예제 반대론자(Anti-slavery Man)였던 에이브러
햄 링컨이 1860년 대선을 승리하면서 장차 자신들의 사유재산제도였던 노예제 폐
기에 대한 남부인들의 공포와 이에 따른 분노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남부의 이탈에
결정적인 정치적 계기는 대선보다는 연방의회 선거였다. 1860년 이전에 민주당은
적어도 상원을 통제할 수 있었지만, 1858년 선거를 통하여 하원을 장악한 공화당이 1860년 의회선거에서 상하양원을 모두 석권하여, 민주당의 남부 출신 상원의원
들이 연방의회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더 이상 힘의 균형을 유지할 수 없게
된 남부 측은 입법부의 권력 구조상 노예제와 관세 문제에서 북부 중심으로 노예
제 반대와 고율 보호관세로 제정될 것을 예상하여 남부의 상원의원들은 연방 상원
에서 이탈하여 새로운 남부연합의 체제를 구축하였다.
미국의 전통주의 사가들은 모릴관세법에 대해 모릴과 존 셔먼의 주장대로 단
순한 세입관세라고 주장했지만, 모릴 관세법은 기초안과 달리 철강 및 모직 등의
모든 미국 제조업 이익단체들과 모릴이 3년간의 협의를 통해 고율기조의 보호관세
로 작성되었다.
세금에 대한 공평한 분배는 오늘날뿐만 아니라 과거 남북전쟁 전에도 중요했
다. 남북전쟁 이전 소득세, 재산세, 상속세와 같은 직접세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연방정부를 운영하는데 있어 주요 재원은 관세였다. 독립전쟁이나 1812년에 발발
한 제2차 미영전쟁와 같은 특수한 시기에 연방 정부는 직접세 징수와 서부로의
팽창과정에서 공유지 판매로 재원을 보충한 적도 있지만, 1913년 소득세 규정이
헌법 수정조항에 명시될 때까지 연방정부의 주요 세입원은 관세였던 것이다.
그러나 남부에 배타적인 현행 재정지출 제도 하에서 관세로 거둬들인 연방정
부의 세수는 남부지역에 공정하게 분배될 수 없었다. 남부인들의 의식에는 자신들
이 북부와 외국에서 들여온 공산품과 사치품 구입 등으로 전체 관세의 3/4을 지불했
으나, 관세로 형성된 연방정부의 세원에 대해 그들은 그 분배가 1/4로 불평등하게
이뤄져 남부가 발전하지 못했다는 소외의식, 열등감, 패배의식 등이 굳게 자리 잡
게 된다. 따라서 연방에서 탈퇴하여, 남부에서 소비된 관세 재원을 온전히 남부에
철도 및 운하, 도로 등의 인프라 구축과 같은 공공사업에 투자한다면 남부지역에
북부의 뉴욕과 같은 대도시의 성장에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남부인들의 눈에는 관세가 단순히 세금문제로만 비쳐진 것이 아니었다. 남북
간의 관세를 통한 역학관계가 준주로의 노예제 확대와 서부의 토지 가격 문제와도
연관되었다. 보호관세로 연방재정이 흑자를 유지할 경우, 공유지 판매로 거둬들이
는 재원이 절실히 요구되지 않을 것이고, 자유 토지를 통해 서부에 무상 또는 저렴
한 공유지가 공급되면, 북부 및 남부 출신자들이 서부로 몰려들 것이고, 이에 따른
남부에서 서부로의 인구유입은 남부지역의 토지가격 하락으로 이어져 남부의 자산 손실과 경제력 약화를 초래할 것이고, 더 나아가 서부에 몰린 인구 수요에 맞는
철도와 같은 인프라 확대는 결국 연방재원이 빠져 나가게 되고, 그의 따른 세금
불공평성에 대한 남부인들의 불만이 팽배되었던 것이다.
영어 초록
This article explores above all the process of establishing Morrilltariff act and the tariff vision of South Elite who sought economic
development through secession. Secondly, this paper deals with the
cause of conflict through the tariff vision of the U.K. people in the
earlier Civil War.
Lincoln’s victory in 1860 election was one of the South’s secessional
causes, there by the South People were enveloped by fear for abolition
of slavery. However The south’s decisive secession was politically not
presidential election but U. S. congressional race. Before 1860 the
Democratic Party controled the Senate’s leadership but through the
off-year election of 1858 the GOP took control of lower house and
finally did both house of congress. So that the South was out of power
of U.S. Congress hegemony.
Historians have generally acknowledged the significance of the
Morrill Tariff. Morrill’s draft bill offered sheep farmers a specific duty
of 8 cents per pound of wool in place of the 24 percent ad valorem
rate from 1857. Implemented as direct response to the fiscal crisis
created by the Buchanan administration, the Morrill Tariff represents Morrill and John Sherman’s effort to augment federal revenue for a
depleted Treasury. Finally president James Buchanan signed to revise
the Tariff of 1857 to arrest the growth of the federal deficit.
Historians have long debated the Morrill tariff’s exact role in the
1860 election, but this much is certain: The South People believed that
Per capita income in the South, in the 1820s and 1830s before the civil
war, was roughly the same as in the North. As time passed, The South
people was certain that the unfair taxation of the South for the direct
benefit of the North: 3/4ths of the federal treasury was supplied by the
South, yet 3/4ths of federal tax revenue was spent in the North. It was
a direct transfer out of the South and into the Pockets of Northerners.
The tariff is the perfect thing to contrast the differences in North and
South. When the South was out of the Union, the North Passed the
astronomical Morrill Tariff.
In the light of The South‘s eye, tariff did not give birth to simple
tax problem. Tariff between the North and the South linked into
regionally free toil problem in West. In the case of Federal
administration surplus due to protective tariff, Federal Adminstration
had no use for Federal Tax Revenue from the selling of public land.
In that invent, the settlers supplied with the free toil were flocked into
west and the south’s toil value was falling. this course linked into the
increasing of infrastructure in West, such as railroad. Finally federal tax
leaked into West brought into the grievance of the So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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