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의 정치개혁
- 최초 등록일
- 2017.12.08
- 최종 저작일
- 20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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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최승로의 시무 28조 내용과 성격
Ⅲ. 유교적 개혁 정책
Ⅳ. 대(對)불교시책
Ⅴ. 개혁의 졸속추진과 반발
Ⅵ. 맺음말
Ⅶ. 참고문헌
본문내용
머리말
경종이 27세의 젊은 나이로 죽자 그 뒤를 이어 성종이 즉위하였다. 성종은 태조 왕건과 신정왕후 황보씨 소생 7남인 대종욱의 아들로, 어릴 적부터 유교적 소양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의 일대에 고려의 많은 제도와 문물이 정비되었는데 그것은 그의 시호에서도 엿볼 수 있다.《고려사절요》찬자는 성종의 “성품이 엄정하고 도량이 넓어 법을 세우고 제도를 정하는데 절의를 숭상하였으며 현사를 구하고 백성들을 구휼하여 정치가 볼만한 것이 있었다.”라고 평하고 있다.
성종은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바탕으로 유교적 정치개혁을 단행했다. 이 과정 속에서 이른바 ‘화풍’과 ‘토풍’으로 불리는 세력 간의 다툼이 발생한다. 화풍은 중국의 풍속이나 기풍을 말하며, 반대로 토풍은 고려 또는 삼한 고유의 풍속이나 기풍을 의미한다.
본 발제는 먼저 1장에서 최승로의 시무 28조의 내용과 그 성격을 살펴본 다음, 그를 바탕으로 2장에서 성종대에 행하여진 유교적 중앙집권화 정책을 살펴보겠다. 3장에서는 성종의 대불교시책을 살펴볼 것이다. 성종의 대불교시책은 최승로의 시무 28조와 다소 차이를 보이는데 어느 점이 다른지, 그것이 단순한 정책 집행에 있어 차이인지, 아니면 근원적 노선의 차이인지 논의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4장에서는 성종의 급격한 유교적 정치개혁의 한계점을 논의해 보겠다.
1. 최승로의 시무 28조 내용과 성격
최승로는 신라 경애왕 4년(927)에 신라의 서울 금성에서 태어났다. 그가 9살이 되던 935년, 신라 경순왕은 고려에 항복하고 개성으로 갔다. 이때 최승로는 아버지와 함께 경순왕을 따라 고려로 갔다. 12세 때 태조의 부름을 받아가서 논어를 읽고 칭찬을 받은 그는, 한동안 문한직에 머물러 있다가 성종원년(982년)에 왕의 요청에 응하여 긴 상서문을 올리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시무28조이다. 비록 28조목중에 6 조목이 없어지긴 했지만, 그 대부분이 남아 있는 것이어서, 당시의 정치·경제·문화 등 여러 면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로서 존중되고 있다.
참고 자료
《삼국유사》
《고려사》
《고려사절요》
구산우, 2015「고려시기 제도와 정책의 수용과 배제 - 成宗代 華風과 土風의 공존과 갈등을 중심으로」한국중세사연구』42
김갑동, 1993「성종대 지배체제의 정비」 한국사12, 국사편찬위원회
이기백, 1997「최승로와 그의 정치사상」 최승로상서문연구
조경시, 2000「高麗 成宗代의 對佛敎施策」 한국중세사연구9
홍승기, 2002「최승로」 한국사시민강좌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