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의 아름다움
- 최초 등록일
- 2009.04.10
- 최종 저작일
- 20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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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창덕궁에 대한 감상문
목차
Ⅰ. 머리말 _ 1
Ⅱ. 본론 - 창덕궁의 역사와 아름다움 _ 2
1. 창덕궁의 유래 _ 2
2. 창덕궁의 구성과 정각의 의미 _ 3
돈화문 _ 3
금천교 _ 3
인정문, 인정전 _ 4
선정전 _ 5
희정당 _ 6
대조전 _ 7
3. 정각의 아름다움과 우수함 _ 9
부용정, 영화당, 주합루 _ 9
애련정, 어수당 _ 12
연경당 _ 12
존덕정 _ 13
옥류천 _ 13
Ⅲ. 맺음말 - 궁을 나서며 _ 14
< 참고문헌 > _ 15
본문내용
Ⅰ. 머리말
창덕궁이 종묘와 더불어 세계문화 유산에 등록되자 서울의 조선조 여러 궁실건축이 아연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창덕궁을 사랑하는 마음이 고조되었다. 그만큼 창덕궁은 일반 백성들에게 사랑받는 궁궐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조 최후의 임금인 순종이 경술국치 이후로도 이 궁에 살고 있었고 마지막 황비인 윤비가 낙선재에 칩거하다가 서거하면서 최후의 국장이 예대로 치러졌다는 회상이 남아 맴도는 곳이기도 해서 창덕궁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지극한 편이다.
창덕궁은 공개되어 있긴 하나 현재는 시간에 맞추어 단체로 관람하는 제도이어서 들어가기가 까다롭고 그 제도가 껄끄러워 의외로 가보지 못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창덕궁은 정궁인 경복궁과 격이 다른 이궁으로 출발하였고 동궐(東闕)이란 별명이 있다. 태종시 행랑(行廊)이 완성되었을 때는 돈화문으로부터 시작하여 광통교 건너 숭례문에 이르기까지 도로 좌우로 즐비하게 계속되어 도시의 구성에 짜임이 있었다. 태종은 그 행랑의 시작을 창덕궁으로부터 비롯하고 있다.
한양 도성의 남북 중심선에서 보면 백악산(白堊山, 지금 청와대 뒷산) 아래에 있는 경복궁은 훨씬 서편으로 기울어진 자리에 있다. 그 편재(偏在)가 논의의 대상이 되었고 삼각산의 주맥이 응봉에 있으니 지리의 형국으로는 창덕궁이 지맥의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논의가 대두되기도 하였다.
태종이 창덕궁을 창건한 이래로 역대 임금은 경복궁에 살기 보다는 창덕궁에 살기를 희망하고 여러 임금들이 임어(臨御, 임금님이 머물다)하였다. 특히 임진왜란으로 도성의 여러 궁궐들이 다 재해를 입었고, 전쟁 이후 복구로 경복궁보다 창덕궁이 먼저 중건되자 역대 임금들은 창덕궁에 머물면서 경복궁 중건에 힘을 기울이지 않았다.
겨우 말년에 이르러 흥선 대원군에 의하여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하는 큰 역사를 일으켜 국비를 탕진해 가면서 경복궁을 다시 이룩하였으나 고종은 경복궁보다는 경운궁과 창덕궁에 기거하기를 즐겼고, 조선조 최후의 임금인 순종은 창덕궁에서 말년을 지내가 거기에서 승하하였다.
참고 자료
- 최종덕 외 4명 , 2005, 문화재청 창덕궁 관리소, 동궐도 읽기
- 허균 지음 , 1967년, 고궁산책, 교보문고
- 글 한영우 사진 김대벽 , 2006년 , 조선의 집 동궐에 들다 , 열화당 효형출판
- 글 신영훈 사진 김대벽 , 1998년 , 조선의 궁궐 , 조선일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