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산서원과 임고서원
- 최초 등록일
- 2009.05.12
- 최종 저작일
- 2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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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옥산서원과 임고서원
목차
1. 二水三山의 고장, 永川
2. 정몽주와 임고서원
3. 이언적의 옥산서원
본문내용
예로부터 영천은 二水三山의 고장이라 불렸다. 『동문선』을 편찬한 조선 성종대의 학자 서거정이 예전에는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와 더불어 영남 삼루에 꼽혔다는 영천의 瑞世樓(서세루)에 올라 읊었다는 시구 「白雲黃鶴幾時廻 二水三山次第開 : 흰 구름 누른 학은 몇 번이나 돌아왔던고? 두 강물 세 산이 차례로 펼쳐졌네」에서 온 말이다. 그는 또 서세루에 부친 기문에서, 영천을 경상도의 가장 아름다운 군이라 말하고 영천이란 이름의 뜻은 二水라 풀이하기도 하였다. 永을 破字하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모두가 풍광이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고장이라는 말이겠는데, 그래서 그런지 일찍부터 사람들이 모여 삶의 터전을 닦았다. 부족국가시대의 영천에는 弁辰(변진)24국 가운데 하나인 골벌국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영천의 뿌리가 깊고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말해주는 사실이다. 일찍부터 사람들이 사회조직을 갖추고 모여 살 만큼 이 지역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요충지였었다. 골벌국(骨伐國)은 골화국(骨火國), 골벌소국(骨伐小國)이라고도 하는데 후에 신라에 절야화군(切也火郡)과 사정화현(史丁火縣)으로 나뉘어 신라군현체제에 흡수되어 경주의 외곽방어지역의 기능을 담당했으며, 후삼국기에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과 후백제의 견훤, 신라가 고려에 항복한 후에는 왕건과 견훤이 이곳을 무대로 세력을 다투었다. 조선중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천성은 곧 함락되었으나, 관군의 힘을 빌리지 않고 의병만의 힘으로 가장 먼저 탈환한 곳이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에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영천시내를 가로지르는 금호강 주변이 그 전장으로 국군과 인민군이 서로 뺏고 빼앗기기를 거듭했었다. 지금도 큰 군사시설과 제3사관학교가 이곳에 자리 잡고 있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역사적 사실들이다. 영천은 군사, 교통의 요충지로서 상당히 발전된 지역이었기는 하나 그 내면에는 아픈 기억들도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