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산도 주민 김이수와 정조의 만남으로 본 역사적 교훈
- 최초 등록일
- 2009.05.14
- 최종 저작일
- 20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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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흑산도 주민 김이수와 정조의 만남으로 본 역사적 교훈에 관한 글입니다^^
역사적 사건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에 대해서 생각한 글이고요,
이 주제에 흥미를 가지고 계시는 분들에게는 참신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아무쪼록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ㅎㅎ
목차
Ⅰ. 서론
Ⅱ. 김이수와 정조의 만남
1. 흑산도 주민 김이수
2. 김이수의 민원 해결 행적
3. 김이수와 정조의 만남
Ⅲ. 역사의 교훈: 여론 수렴의 정치
1. 정조의 정치관
2. 역사의 교훈
Ⅳ.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1791년 1월18일, 정조 임금의 행차가 있었다. 친위대의 삼엄한 경호 속에 놓여 있는 정조 임금, 그러나 임금의 행차를 멈추게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흑산도에서 온 주민 김이수(金理守), 이름난 학자도, 높은 관직 생활을 한 정치인도 아니었는데, 평범한 섬 마을 주민인 김이수는 어떻게 한양에서 임금의 행차를 멈춘 것일까.
김이수는 국가최고지도자를 만나 그를 움직였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역사상 전무후무한 가장 극적인 만남일 것이다. 그렇다면 김이수는 왜 정조를 만나려고 했던 것일까, 어떻게 만났는가, 그리고 이 역사적 사건이 우리에게 무엇을 일깨워 주는가. 이것이 이글의 동기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흑산도 주민 김이수와 정조의 극적인 만남의 역사적 현장으로 들어가 보자.
Ⅱ. 김이수와 정조의 만남
1. 흑산도 주민 김이수
김이수(金理守)는 흑산도 부속도서 대둔도에서 나고 자랐다. 지금도 흑산도와 그 부속도서에서는 김이수의 행적들이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다. 김이수가 정조 임금을 만나 흑산도의 민원을 해결하자 섬 주민들이 중죽도에서 독점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해산물 수확권을 주었고 그가 죽었을 때에는 주민장이 치러질 정도로 섬 주민들에게는 칭송의 대상이었다. 해산물에 의지하며 살았던 섬주민들에게 김이수는 흑산도의 절박한 문제를 바로잡은 민원해결사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2. 김이수의 민원 해결 행적
조선시대에 백성들이 억울한 사정을 임금에게 호소할 수 있는 방법으로 흔히 신문고를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신문고를 울리려면 어디로 가야했을까. 바로 의금부이다. 대역 죄인들을 잡아다 신문하던 의금부 마당 한가운데에 신문고는 설치되어 있었다. 실제적으로 신문고를 이용한 사람들은 사대부 양반뿐이었다. 일반 백성들은 병사들의 감시가 삼엄하고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의금부 마당 한가운데의 신문고에 감히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그나마 유명무실해진 신문고도 연산군 때는 아예 폐지되었다. 그렇다면 김이수는 어떻게 임금을 만날 수 있었을까.
참고 자료
◉ KBS 역사추적, 제22회: 흑산도 주민 김이수, 어떻게 정조 임금을 움직였나?, 2009.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