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을 계승한 강우지역의 학맥
- 최초 등록일
- 2009.05.27
- 최종 저작일
- 20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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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남명을 계승한 강우지역의 학맥에 관하여 쓴 간략한 글이다.
목차
Ⅰ. 들어가며.
Ⅱ. 남명학파의 위기와 쇠락.
Ⅲ. 18세기 강우지역 남명학파의 동향.
1)노론화와 남명학파의 위축.
2) 남인의 퇴계 학파화.
3) 남명 추숭.
Ⅳ. 19세기 강우지역에 부는 남명학 열풍.
Ⅴ. 나오며.
본문내용
Ⅰ. 들어가며.
‘퇴계와 퇴계 학파’에 대한 이해에 비하면 ‘남명과 남명학파’에 대한 연구와 이해는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성리학파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퇴계학파’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당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남명학파’의 위치를 고려해보면 지금의 이러한 형편없는 대우는 이해하기 힘들다.
남명학파는 조선 정치사의 전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조선시대의 어느 학파보다 극적인 면모가 강하다. 그들은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참여함으로서 조선 선비의 중요한 한 특성을 나타냈다. 향촌의 지주들이 토지와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의병’을 했다는 마르크시즘적 해석도 있으나, 의병을 일으킴으로 해서 ‘만석꾼’ 재산을 탕진했던 곽재우 장군의 사례는 이러한 해석 구도에 대해 중요한 반례를 제공한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세력은 광해군 정권의 전복과 남명의 제자인 ‘정인홍’을 위시한 북인정권을 흠집 내기 위해 그들의 사상적 기반이나 다름없던 ‘남명’을 흠집 내기 시작하였고 그러한 견해들이 확대․재생산 되어 왔다. 당대의 많은 학자들이 ‘주자학적 보편주의’의 틀 속에서 남명을 바라보려 했고, 그런 갇힌 시각 속에서 남명은 그 진면모를 드러내기 어려웠다.
그러나 최근에 광해군시대에 대한 재평가와 임진왜란과 남명학파 의병에 대한 객관적 이해의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왜곡되지 않은 남명학파에 대한 재인식이 사상사뿐 아니라, 당쟁사․전쟁사의 이해에 중요하다는 공감대가 이루어져 가고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남명학파’의 사상에 대하여 접근하기 보다는 광해군 이후의 ‘남명학파’의 쇠락 양상과 그 학문을 계승한 강우지역의 학맥에 대하여 접근해보고자 한다.
Ⅱ. 남명학파의 위기와 쇠락
남명학파는 남명이 벼슬길에 뜻을 두었던 인물이 아니었기에, 여러 가지 면에서 여타의 학파들과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사상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유력한 학문적 벗들이 남명의 학문과 사상의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고,
참고 자료
박병련, 「남명학과 영남 강우․․강안지역 사림의 동향」『국학연구』제 7권 , 한국국학연구원, 2008.
박병련,「남명학파 성쇠과정의 정치사회적 특성과 사림의 동향」『남명학연구원총서』Vol.2, 남명학연 구원, 2008.
신병주, 「남명 조식의 학풍과 남명문인의 활동」 , 남명학연구논총3, 1995
이상필, 『남명학파의 형성과 전개』, 고려대 박사논문, 1998.
이상필,「18세기 강우지역 남명학파의 분포와 동향」『남명학연구』Vol.12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