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사건
- 최초 등록일
- 2009.06.01
- 최종 저작일
- 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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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근,현대사의 사건 중 관심이 있던 인혁당 사건에 대해 발표자료로 활용하였습니다.
인혁당 사건에 대해 전반적인 내용이 쉽게 설명되어 있어 한번 읽으면 사건에 대해
확실히 인지가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총4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당시 수업교재 및 각종 문서
도서, 자료를 수집하여 사건에 대한 느낀점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목차
< 서론 >
* 인민혁명당 사건이란?
< 본 론 >
1. 1차2차 인혁당 사건
2. 의문사진상규명위 조사 결과
3. 재심 청구
< 결 론 : 느낀점 >
본문내용
< 서론 >
* 인민혁명당 사건이란?
약칭 인혁당사건이라고 한다. 중앙정보부는 "인민혁명당은 대한민국을 전복하라는 북한의 노선에 따라 움직이는 반국가단체로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포섭, 당조직을 확장하려다가 발각되어 체포된 것"으로 발표하여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사건 직후 한국인권옹호협회가 무료변호를 맡고 피고인에게 가해진 고문내용을 폭로하여, 1965년 1월 20일 선거공판에서 반공법 위반으로 도예종(都禮鍾), 양춘우(楊春遇)는 각각 징역 3년,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나머지 11명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판결에 대하여 검찰은 불복, 항소심을 제기하였고, 그 해 5월 29일 열린 항소심선고공판에서 재판부는 원심을 파기, 피고인 전원에게 유죄선고를 내리고, 도예종․양춘우 외에도 박현채를 비롯한 6명에게 징역 1년,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하였다.
1972년 10월 17일 유신이 선포된 이후 유신반대투쟁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중앙정보부는 투쟁을 주도하던 민청학련 1973년 8월 김대중(金大中)납치사건에 국내외 여론이 크게 자극되어 반유신체제운동이 일어났다. 9월 개학과 더불어 대학생들의 시위사태는 점차 반독재․반체제 움직임으로 성격이 바뀌면서 전국 고등학교에까지 파급 ․확대되었으며, 일부 야당인사․지식인과 종교인들은 민주헌정의 회복 및 공화당정부의 인권탄압을 규탄하면서 본격적인 개헌서명운동을 벌였다.
사태에 대처하기 위하여 당시 대통령 박정희는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 2호를 공포하고 일체의 개헌논의를 금지하였으며, 위반자를 심판할 비상군법회의를 설치하였다. 이로 인하여 학생들의 운동은 교내에서 지하신문 발행과 동맹휴학 등의 방법으로 계속되었고, 종교계 일각에서는 일부 지식인과 교회에서 시국선언문을 채택하는 등 비밀 개헌서명운동을 추진하였다.
4월 3일 박정희는
참고 자료
참고문헌 ] 수업교재 외 각종 문서,도서,인터넷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