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제우와 최시형
- 최초 등록일
- 2009.06.17
- 최종 저작일
- 20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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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최제우와 최시형에 대해 간단히 조사한 레포트
목차
최제우(崔濟愚)
최시형
미륵불 신앙
정 감 록
본문내용
최제우(崔濟愚)
1824(순조24)~1864(고종1) 동학(東學, 천도교)의 창시자로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수운(水雲) 또는 수운재(水雲齋), 초명 복술(福述), 제선(濟宣), 자는 성묵(性黙)이다.
경주 출신으로 아버지는 최욱(최 )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7대조인 최진립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혁혁한 공을 세워 병조판서의 벼슬과 정무공의 시호가 내련진 무관이었으나, 6대조부터는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몰락양반 출신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일찍부터 경사(經史)를 공부하여 학문에 정진하였으나 기울어져가는 가세와 함께 조선 말기의 체제 내부적 붕괴양상 및 국제적인 불안정이 그의 유년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3세의 나이로 울산출신의 박씨와 혼인하였고, 4년 뒤 아버지를 여의었다. 3년상을 마친 뒤에는 집안살림이 더욱 어려워져 여기저기로 떠돌아다니며 갖가지 장사와 의술, 복술 등의 잡술에 관심을 보였으며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세상인심의 각박함과 어지러움이 바로 천명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난 것을 깨닫고 천명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하였다. 1844년(헌종 10) 구도행각에 나선 지 10년 만에 울산(蔚山) 유곡(裕谷)에 은거, 수도에 들어갔다.
이 무렵 가세는 거의 절망적인 상태에까지 기울어져 있었고, 국내 상황은 삼정이 문란 및 천재지변으로 크게 혼란된 분위기였으며, 국제적으로는 애로호사건을 계기로 중국이 영불연합군에 패배하여 텐진조약을 맺는 등 민심이 불안정한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아내는 데 유일한 희망을 걸고 이름을 제우라고 고치면서 구도의 결심을 나타냈다. 그리스도교적 영향과 유불선(儒佛仙)의 장점을 융합하여 ꡐ시천주(侍天主) 사상ꡑ을 핵심으로 한 ꡐ인내천(人乃天)ꡑ의 교리를 완성하고 동학을 창시했다.
천(天) 인(人)을 대도(大道)의 근원으로, 성(誠) 경(敬) 신(信)을 도행(道行)의 본체로, 수심정기(守心正氣)를 수도의 요결로 삼고 포교를 시작하여 도를 천도(天道)라 하고, 농민 천민 유생에 이르는 광범한 계층에 전파했다. 1861년 포교를 시작하였고, 곧 놀라울 정도의 많은 사람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