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士禍)-무오사화(戊午士禍),갑자사화(甲子士禍),기묘사화(己卯士禍),을사사화(乙巳士禍)
- 최초 등록일
- 2009.06.17
- 최종 저작일
- 20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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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사화를 조사한 레포트(한자사용)입니다
목차
사화(士禍)
무오사화(戊午士禍)
갑자사화(甲子士禍)
기묘사화(己卯士禍)
을사사화(乙巳士禍)
본문내용
사화(士禍)
사화는 성종대 이후 중앙정계에 새로운 정치세력으로서 등장하기 시작한 사림이 피화를 당한 일련의 정치적 사건을 일컫는다. 발생요인을 달리하면서 연산군대에서 명종대까지 모두 4차례의 사화가 발생하였다. 무오사화(연산군 4, 1498), 갑자사화(연산군 10, 1504), 기묘사화(중종 14, 1519), 을사사화(명종 즉위년, 1545)가 그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화를 거치면서 사림이 계속 피화를 당하였으나 16세기 중엽 이후 이들이 전적으로 정치를 주도하는 양상이 초래되었다. 훈척(勳戚)에서 사림으로의 정치세력 교체뿐만 아니라 거듭된 사화와 신료 주도의 반정을 거치면서 조선 초기 이래의 군신(君臣) 권력관계가 새롭게 정립된 사실도 주목된다. 다시 말해 권력관계에서 어느 일방이 절대화되어 전제적(專制的) 또는 권신적(權臣的) 경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지양하고, 상대성을 전제로 한 새로운 군신 권력관계가 형성되었다. 절대성이 전제가 된 조선 초기의 군신 권력관계가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상대화된 군신 권력관계로 재편되었던 것이다.
무오사화(戊午士禍)는 연산군 4년(1498)에 이극돈(李克墩)·유자광(柳子光) 등이 『성종실록(成宗實錄)』의 편찬을 위해 김일손(金馹孫)이 그의 스승 김종직(金宗直)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로 제출한 것을 구실로 하여 발생하였다. 조의제문은 항우(項羽)가 폐위시킨 중국 초(楚)나라의 마지막 왕인 의제(義帝)를 애도하는 내용의 글로 되어 있다. [자료1] [자료2] 요컨대 세조의 왕위승계가 유교적 명분에 어긋난다는 사림의 인식을 반영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이미 사거(死去)한 김종직뿐만 아니라 그의 문인(門人) 대부분이 피화를 당하였다. 사초로 인해 발생하였기 때문에 무오사화(戊午史禍)라고도 한다. 무오사화는 김종직 일파와 훈구파 간의 알력, 사림 및 언관(言官)의 도전에 대한 훈구파 및 정조계(政曹系) 노성대신(老成大臣)의 대응, 사회경제적 성과로 재지 중소지주층에서 새로운 정치세력이 형성되어 이들이 기성의 특권 관료층의 정치에 대해 비판적 자세를 보임에 따라 일어난 마찰, 삼사(三司)의 역할 증대에 대한 일종의 제재조치, 홍문관의 언관화(言官化) 이후 야기된 정치구조의 변화에 대한 왕과 재상의 결속에 의한 반동 등 여러 요인이 중첩되면서 발생하였다.
참고 자료
뿌리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