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호관 이인상 (凌壺觀 李麟祥) 연구
- 최초 등록일
- 2009.06.26
- 최종 저작일
- 20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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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인상은 서출일 수밖에 없는 제약이 평생 따라다녀, 결국은 문과에 응시할 수도 없었고, 종6품의 말단을 면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런 신분적 제약의 불합리성을 사회적 차원에서 찾아보며 그것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를 가져본 일도 없었고, 아직 사회가 그만큼 성숙해 있지도 못했다. 반대로 그는 사대부적 윤리와 기강을 여느 사대부보다도 철저히 지킴으로써 자신의 신분적 열등을 벗어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다. 사대부 그 누구보다도 더 사대부적 학식과 교양을 갖고 있음을 과시하면서 그 설움의 피해를 보상받으며 살아간다. 때문에 그는 사대부적 자세라는 규범을 원리 원칙대로 지키며 완고한 성격을 고수하면서, 양빈의 신분이면서도 그 체통과 위신을 지키지 못하는 자는 백안시해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은사의 풍모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서출이라는 열등감을 보상받기 위한 역작용일 수도 있는 것이다.
목차
1. 능호관 이인상의 생애
2. 능호관 이인상의 명작
1) 설송도
2) 수석도
3. 마치며
본문내용
- 이인상의 생애
이인상의 본관은 전주 이씨 밀성군파로 이 집안은 당대의 명문 중에 명문으로 그 문벌을 앞세우기 위하여 다른 전주 이씨와 구별하여 완산 이씨라는 별칭을 사용할 정도였다. 특히 이인상의 고부조인 백강 이경여 이후 이 집안은 크게 번성하였다. 백강은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인물로 친명배청을 주장하여 한때는 심양에 억류된 적이 있는데, 그의 이러한 지조와 정치적 입장은 훗날 노론사회에서 크게 존중받는 바가 되었다. 그리고 백강의 자손들은 크게 번성하여 5명의 정승과 3대에 걸친 대제학을 배출할 정도였으며, 그 종가의 권세에 힘입어 음보가 방계인 이인상 집안까지 내려지게 된다.
필자미상, 이인상초상화(李麟祥肖像畵)
이인상의 집안은 이처럼 당대의 명문이었지만, 불행하게도 서출이었다. 그의 증조부인 민계가 백강의 서자였기 때문에 이인상은 이른바 원대서족인 셈이었다. 그러나 이인상이 서출이라고 해서 곧 그의 예술이 곧 서얼신분의 무엇을 대변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의 예술세계에는 서출의식이란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어떤 사대부도 보여주지 못했던 심오한 문인화의 세계에 도달한 것이었다. 서출인 이인상이 신분의 제약을 어느 정도 벗어난 것은 아마도 두 가지 점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해석되는 데, 하나는 그가 명문출신으로 당시 노론의 권세 하에서 높이 추앙받던 백강 이경여의 후손이라는 집안배경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고, 또 하나는 서얼허통에 점점 관대해지는 당시의 추세라는 점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이인상의 신분적 해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서출일 수밖에 없는 제약이 평생 따라다녀, 결국은 문과에 응시할 수도 없었고, 종6품의 말단을 면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런 신분적 제약의 불합리성을 사회적 차원에서 찾아보며 그것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를 가져본
참고 자료
류승민, 능호관 이인상(1710-1760)의 산수화 연구, 2007.
유홍준, 조선시대 화가상의 삶과 예술 능호관 이인상, 1991.
유홍준, 문인화가 이인상의 작가상 연구, 1984.
유홍준, 화인열전 2 - 고독의 나날속에도 붓을 놓지않고,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