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중국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제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秦王(진왕), 정(政)의 출생과 즉위 당시
Ⅱ. 친정(親政)의 시작
Ⅲ. 진의 발전과 이사의 등장
Ⅳ. 전국 통일과 황제
Ⅴ. 진시황의 정책
Ⅵ. 진시황의 대규모 공사
Ⅶ. 진시황의 마지막과 진시황릉
Ⅷ. 과제를 마치며
※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秦王(진왕), 정(政)의 출생과 즉위 당시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였고, 최초로 황제라는 용어를 사용한 사람은 누구인가 하면, 누구든 진시황(秦始皇)이라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 진시황은 유명한 황제 중 한 명이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시황제(始皇帝)는 처음부터 진의 시황제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본래 이름은 정(政)이고, 성은 영(嬴)이었다.
그의 출생에 대해서 알려면, 그의 아버지인 장양왕(莊襄王)의 이야기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장양왕의 할아버지는 진의 소양왕이었는데, 소양왕이 재위 중에 장양왕은 조(趙)에 인질로 보내져 그 당시 조의 수도였던, 한단(邯鄲l: 현재 하북성 현단현 서북)에 살며, 공자 자초(子楚)라고 불리었다. 그러던 중 한단의 대상인이었던 여불위(呂不韋)가 자초에게 많은 금을 주고, 그것을 통해 명사와 교제하게 하여 평판을 높이도록 노력하게 했다. 그러면서 진의 많은 공자들 중 하나였던 자초에 대한 평판이 높아졌다. 그러자 소양왕의 태자비인 화양부인이 자초를 진나라의 후계자로 되게 하였다. 그러자 여불위는 자초에게 자신의 애첩이자 한단의 부호집 딸인 가희를 헌납하였다. 그래서 소양왕 48년 정월(기원전 259년)에 아이가 태어났고, 그의 이름이 정(政), 즉 시황제가 된다.
이런 시황제의 친부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사마천의 『사기』의 여불위열전에는 가희가 임신 중이었고, 자초에게 이 사실을 숨기고 그의 여자가 되었다고 적어놓았다. 이것으로 보면 시황제는 자초의 아들이 아닌,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서』를 쓴 반고는 시황제는 여정(呂政)이라 부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20세기 역사가인 곽말약은 시황제가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설은 부정하였다. 이렇게 시황제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 이후, 소양왕이 죽자, 자초의 아버지인 효문왕이 즉위하였고, 자초는 태자로 정해졌다. 그러나 효문왕은 즉위한지 3일 만에 급사하였고, 자초가 장양왕으로 즉위하였다.
참고 자료
나시지마 사다오 지음, 임대희 옮김, 『중국의 역사-진한사』, 혜안, 2004
리우웨이 지음, 김양수 옮김, 『황제의 나라』, 시공사, 2004
요시까와 다다오, 박희준 역주, 『實傳 진시황』, 해돋이,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