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만식 [탁류]
- 최초 등록일
- 2009.10.31
- 최종 저작일
- 2009.10
- 10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작가소개, 시대적 배경, 작품해설, 등장인물, 교과서 학습활동 해설
목차
-작가소개
-줄거리
-핵심정리
-구성
-해설
-‘탁류’의 상징적 의미
-여주인공 ‘초봉’의 다중적 이미지
-비판적 리얼리즘 소설로서의 성과와 한계
-성장소설적 성격
-풍자소설적 성격
-<탁류>에 나타난 패러디
-<탁류>의 공간적 배경 ‘군산’
-학습활동
본문내용
-작가소개
채만식은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기 몇 해 전에 태어나 한국정부가 수립된 직후에 사망한 작가이다.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눈앞의 현실에 대한 허무의식에서 싹터 사회의 부조리를 아이러니ㆍ기지ㆍ야유ㆍ조소 등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풍자기법은 김유정에 이어 채만식(1902~1950)의 「태평천하」와 「탁류」에 와서 극치를 이룬다. 평론가 김병익은 채만식에 대해 “경향 문학에 동조하되 결코 카프 조직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프로 문학을 벗어나되 당대의 구조적인 모순의 현실에 정면으로 대결하며, 발랄한 풍자 정신으로 인간과 세태를 묘사하되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통철한 비판 정신을 잃지 않은 작가— 채옹 채만식은 「삼대」를 쓴 횡보 염상섭과 함께 30년대 조선의 비극적인 상황을 가장 깊이 인식하고 근원적으로 비판하면서 ‘진보에의 신념’을 끝까지 감추지 못한 대기(大器)의 지성인이었다”라고 평가한다.
그는 1902년 전라북도 옥구에서 태어났는데, 채만식은 부유한 농촌지주였던 아버지 덕분에 서울과 도쿄에서 유학생활도 할 수 있었다. 보통학교를 거쳐 1918년 서울로 올라와 중앙고보를 나온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식민지 지배체제 속에서 급격하게 몰락한 다른 부농과 마찬가지로 그의 집안 역시 쇠락의 길을 걸어야 했다. 채만식은 학업에 열중하는 한편 축구 선수로 나서는 등 활기에 찬 대학 생활을 하지만, 관동 대지진과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졸업을 포기하고 1923년 귀국한다. 채만식은 학업을 중단하고 일본에서 귀국한 이후 줄곧 집안의 가장으로 글을 써서 먹고살아야 했다. 채만식이 대가족제도의 전통적 습속 속에서 성장했다는 점, 조혼으로 인한 갈등, 그의 집안이 근대화의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소외되고 몰락한 농촌부르주아였다는 전기적 사실은 작품을 읽을 때 중요한 참조사항이 된다.
귀국 후 사립학교 교원을 거쳐 『동아일보』, 『조선일보』, 『개벽』 등에서 학예부 기자생활을 했던 채만식은 1924년 춘원 이광수의 추천을 받아 『조선문단』에 단편 「세 길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이후 채만식은 단편 소설을 비롯해 수필ㆍ희곡ㆍ평론 등을 꾸준히 쓰지만 지면에 발표는 별로 하지 않다가 1930년대 들어서면서 『별건곤』에 단편 「병조와 영복이」, 희곡 「낙일」 등을 내놓아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벌인다. 이어 그는 1931년에 『동광』에 희곡 「사라지는 그림자」를, 『혜성』에 「화물 자동차」를, 1932년 『신동아』에 단편 「부촌」 등을 발표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