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덕의 생애와 자연학 사상
- 최초 등록일
- 2009.11.05
- 최종 저작일
- 20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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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경덕의 생애와 그의 사상에 대한 레포트 입니다.
A+ 받은 자료예요! 좋은 참고 자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_^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서경덕의 생애
2. 서경덕의 지역적 배경과 학풍의 형성
3. 학풍의 특징
4. 사상
1) 자연철학
2) 마음이론
3) 그 외의 사상
Ⅲ. 결론
*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화담 서경덕은 많은 저술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서경덕에 대해서는 당대 및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화담의 학문이나 사상에 대해 언급한 글들이 있기에 그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화담 철학을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할 소지가 있는 것은 화담 철학의 철학적 문제들이 주자 철학뿐만 아니라 소옹, 장재 그리고 일부나마 도가적 경향까지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Ⅱ. 본론
1. 서경덕의 생애
화담 서경덕은(徐敬德 1489~1546)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로서 주기론(主氣論)의 선구자이다. 부위 호번의 아들이며 모계는 실전이다. 본관 당성(唐城), 자 가구(可久), 호 화담(花潭)·복재(復齋), 시호 문강(文康)이며 부위(副尉) 서호번(徐好蕃)의 아들이다. 화담이라는 호는 그가 송도의 화담에 거주했으므로 사람들이 존경하여 부른 것이다. 가세가 빈약하여 독학으로 공부를 하였고, 주로 산림에 은거하면서 문인을 양성하였으며,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19세에 태안이씨 선교랑 계종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31세 때 조광조에 의해 채택된 현량과에 응시하도록 수석으로 추천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개성 화담에 서재를 세우고 연구와 교육에 더욱 힘썼다. 1531년 어머니의 요청으로 생원시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더욱 성리학의 연구에 힘썼다. 1544년 김안국 등이 후릉참봉에 추천하여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계속 화담에 머물러 연구와 교육에 몰두하였다.
조식(曺植), 성운(成運) 등 당대의 처사(處士)들과 지리산·속리산 등을 유람하면서 교유하였으며, 1544년 김안국(金安國)이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천거하였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학문경향은 궁리(窮理)와 격치(格致)를 중시하였으며, 선유의 학설을 널리 흡수하고 자신의 견해는 간략히 개진하였다. 또한 주돈이(周敦頤)·소옹(邵雍)·장재(張載) 등 북송(北宋) 성리학자의 학문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참고 자료
*신병주, {남명학파와 화담학파 연구}, 일지사, 2000
*황광욱, {화담 서경덕의 철학 사상}, 심산, 2003
*주홍성, 이홍순, 주칠성, {한국 철학사상사}, 예문서원,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