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이중신앙체계와 우리나라 다종교 현상의 비교
- 최초 등록일
- 2009.11.19
- 최종 저작일
- 20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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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러시아의 이중신앙체계와 우리나라 다종교 현상의 비교에 대한 레포트
목차
1. 끼예프 루시의 정교수용
2. 이중신앙체계
3. 한국의 다종교와 러시아의 이중신앙 비교
본문내용
1. 끼예프 루시의 정교수용
러시아에 기독교가 처음 유입된 것은 끼예프 루시 때의 987년이었다. 이는 러시아 최초의 역사서인 <원초 연대기>에서 전해지는 일화를 찾아볼 수 있다. 당시에 여러 종교의 사절단이 끼예프 루시를 찾아와 끼예프 루시를 다스리던 블라지미르 대공을 만났다. 이슬람, 로마 가톨릭, 유대교가 찾아왔지만 블라지미르 공은 이들을 모두 거절하였다. 마지막으로 찾아온 자는 비잔틴정교를 믿는 자들이었다. 대공은 그들의 박식함에 감탄하고 귀족과 원로들과 의견을 주고받은 후에 현지에 사람을 파견하여 더욱 상세하게 비잔틴 정교에 대해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 성대한 예배의식을 본 후, 돌아와 비잔틴정교의 아름다움과 장대함을 블라지미르 대공에게 전해주었다. 그리하여 블라지미르 대공은 이듬해인 988년에 바실리라는 세례명을 받고 비잔틴정교를 끼예프 루시의 국교로서 선포하였다.
<원초 연대기>의 저자는 위의 일화와 함께 블라지미르 대공이 정교수용 결심을 굳힌 이유를 그의 눈병의 치유에서 찾았다. 그리스 공주는 그에게 세례를 받으면 눈병이 나아질 것이라 말하였고 실제로 세례를 받은 후 눈병이 나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일화’ 외에 정치․문화사적인 관점에서 정교수용을 설명할 수 있는 복합적이고 근본적인 이유를 파악해 보아야 한다.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첫째로 10세기 말의 당시 국세정세에 따른 수용이다. 당시 기독교는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는 추세였고 끼예프 루시 주변국들의 개종은 끼예프 루시에게 고립되는 위기감을 안겨 주었다. 유럽변방의 비기독교 문화가 아니라 유럽 문화에 편입되기 위해서는 기독교의 수용은 피할 수 없었다. 두 번째로, 블라지미르 대공은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 확실한 기반으로서 이데올로기가 필요하였다. 봉건화된 공후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군주와 국가, 교회의 일치를 기반으로 하는 정교 이데올로기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셋째로 끼예프와 비잔틴의 콘스탄티노플 사이의 교역을 통한 신흥 자본의 형성과 그 자본을 바탕으로 하는 정권 유지의 현실적 기반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넷째로 기독교로의 개종은 비잔틴의 보호를 기대할 수 있게 하였다. 즉 남부 러시아의 평원지대를 지속적으로 위협하던 동부지역의 이민족들의 침입을 막아줄 원군이 필요했던 것이다. 다섯 번째로 희귀하고 진귀한 보석들과 일상 생활 용품과 같은 비잔틴의 풍요로운 물질적 요소들도 관심의 대상이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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