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중립외교
- 최초 등록일
- 2009.11.24
- 최종 저작일
- 2009.09
- 6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500원
![할인쿠폰받기](/images/v4/document/ico_det_coupon.gif)
소개글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고민한 지도자들
그중 광해군의 외교정책에 대해서 알아보고
그 의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서 알아본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얼마 전, 우리나라는 외교문제로 골머리를 앓았고 아직도 찬반 논쟁이 발생하고 있다. 바로 이라크 파병에 관한 문제이다. 논란이 많았지만 결국 정부는 이라크에 우리나라 국군을 파병한다. 파병 부대의 정식 명칭은 ‘이라크평화재건사단’이지만 이름뿐이라는 것은 모두가 다 안다. 지금과 같이 미국의 파병 요청을 해오고 이에 따른 우리나라의 입장 고민과 비슷한 사례가 과거에도 있었다. 바로 조선 광해군대의 일인데, 명이 조선에게 세력이 강해진 후금 공격을 요구한 것이다. 이때 조선은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킬것이냐, 아니면 정황을 잘 살펴 실리적인 선택을 할 것이냐를 두고 공방을 벌인다. 그럼 과연 과거의 이 사건에서 우리는 어떤 점을 배울 수 있고 무슨 교훈을 얻을 수 있는지 알아보자.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선 주변국가들의 정세는 크게 변하게 된다.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변화는 세력이 강해지 북쪽의 여진족을 누르하치가 통일한 후 후금을 세운 일이다. 그당시 조선의 왕은 1608년 선조가 죽은 뒤 왕위를 이은, 바로 광해군이다. 명은 임진왜란때 조선에 원군을 보내 전쟁을 치르는 등, 국력이 많이 약해져 있었고 여진족은 그틈을 타 세력을 키운다. 이제 조선은 고민을 하게 된다. 명과의 의리를 지킬 것인가 새로운 강자인 후금쪽에 붙을 것인가. 이때 광해군이 펼친 외교가 바로 중립외교이다.
당시의 조선의 상황을 살펴보면, 1618년, 임진왜란 전후로 세력을 키운 후금이 명나라의 변방을 위협한다. 이에 명은 토벌군을 조직하고 조선에 파병을 요청하게 된다. 이 요구는 조선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고윤수, “광해군대 조선의 요동정책과 조선군 포로“, [동방학지], 123, (2004), p.45.
명이 후금의 견제를 위해 조선에 도움을 요청했듯이 후금도 조선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려고 시도한다. 후금은 국서를 보내면서 조선군 포로 중 장교 다섯 명을 조선으로 보낸다. 국서에는 명의 파병 요구에 응할 수 밖에 없었던 조선의 사정을 이해한다며 예전 고려와 금나
참고 자료
조선왕조실록 인터넷 :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네이버 백과사전 : http://10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