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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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定慧結社의 成立 背景
1). 時代的 背景
2). 당시 불교계의 상황
3. 定慧結社의 思想
1). 正法, 修道佛敎 재건의 근본이념
2). 定慧結社의 根本理念
3). 禪敎會通, 定慧雙修
4). 頓悟漸修
5). 정혜결사의 正法復歸運動
4. 定慧結社의 性格
5. 定慧結社의 影響
6. 松廣寺의 16國師
7. 맺음말
본문내용
松廣寺는 대한민국의 ‘三寶寺刹’중의 하나로서, ‘僧寶寺刹’로서 유명하다. 송광사가 승보사찰로 불리우는 이유는 이곳이 개창된 이후에 보조국사 지눌로부터 시작하여 16세인 고봉화상에 이르기까지 16명의 국사를 배출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송광사는 麗末부터 시작된 ‘佛敎結社運動’중에서 ‘定慧結社’의 중요한 구심점이 된다. ‘정혜결사’는 명칭 그대로의 선정[定 ]과 지혜[慧자]를 함께 닦는 결사를 말한다. 즉 ‘정혜’ 두 글자가 결사의 이념인 것이다. 신들의 이익을 챙기기에 급급한 나머지 점점 타락의 길로 걸어가던 교종세력에 대한 비판에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불교결사운동’은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송광사에서 제창되게 된다. 이러한 보조지눌의 사상은 이후 송광사의 승려들에게 이어지게 되어 16국사를 배출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16국사가 배출되었다는 설은 지배적인 설이 아니다. 마지막 16세인 고봉화상을 제외시키는 15국사에 대한 설도 주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15국사설’과 ‘16국사설’이 가지는 의미는 굉장히 크다고 할 수 있다.
6). 圓鑑國師 沖止
고려시대 禪僧으로 전라남도 장흥출신이며 修禪社 제 6세를 지냈다. 성은 魏씨이고, 속명은 元凱이며, 본래의 법명은 法桓, 뒤의 법명은 충지이다.
아버지는 戶部員外郞 號紹이며, 어머니는 吏部員外郞 宋子沃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禪林에 나아가 득도하기를 원하였지만 양친의 허락을 얻지 못하여 관직에 몸을 담고 있었으나, 29세에 禪源社의 圓悟國師 문하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비구계를 받은 지 오래지 않아 남쪽의 여러 지방을 순력하였는데, 이는 항상 도를 얻고자 五十三善知識을 찾아다닌 <화엄경> 속의 善財童子를 본받고자 함이었다.
1266년(원종 7) 여름에 원오국사의 敎諭와 朝旨로 인하여 부득이 경상남도 김해군의 甘露寺의 주지가 되었다. 1269년 三重大師가 되었고, 다시 3년 후에는 감로사를 떠나 승주군의 수선사로 옮겼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普照國師로부터 시작된 수선사의 법통을 이어받을 기미가 없었고, 오히려 禪보다는 敎에 치중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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