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위의 화북통일과 호한체제
- 최초 등록일
- 2009.12.06
- 최종 저작일
- 20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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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5호 16국을 통일한 북위의 통일과정과 호한체제에 대한 비판정 성찰
목차
1.북위의 화북통일과 군사지배
2. 문명태후의 정책
3. 효문제(孝文帝)의 한화(漢化)정책
본문내용
1.북위의 화북통일과 군사지배
전진(前秦)은 비수전투에서 강남의 동진(東晋)에게 패하여(383) 붕괴되고 선비족의 북위(北魏)[後魏]가 화북을 재통일하였다(439). 이후 북위는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열되고(534), 다시 동위는 북제(北齊)로, 그리고 서위는 북주(北周)로 계승되어 나갔다. 수가 중국을 재통일하기까지 150년간(439~589) 화북에 건국한 북위 이하의 이들 5개 왕조를 북조(北朝)라고 한다.
1) 부족연합에서 부족해산으로
북위가 5호(胡) 여러 국가와 현저하게 다른 점의 하나는 그 건국 당초에 유목민 여러 부락에 대하여 해산을 단행한 것이다. 이것에 의해 북위는 5호 여러 국가의 중추인 동시에 그 한계이기도 하였던 부족제도를 뛰어넘어 더욱 개방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1) 탁발(拓跋)국가의 등장
탁발국가가 역사상에 등장한 것은 시조 신원(神元)황제로 추증된 역미(力微) 때부터이다. 역미가 탁발국가의 시조로 알려진 까닭은 그가 탁발부를 중핵으로 하는 부족연합국가의 기초를 다졌기 때문인데, 그는 치세 39년에 성락(盛樂)에 본거지를 정하고 제천의식을 거행하였다. 이 의식은 탁발부를 중핵으로 하는 부족연합국가의 건국제(建國祭)를 의미했다. 역미는 이 때 대인(大人)들을 향해 중국과의 우호관계를 맺는, 곧 종래의 초략(抄略)방식을 버리고 화친방식을 취한다고 선언하였다.
(2) 제국형성 이전 탁발국가
역미의 손자 의로(猗盧) 시기에는 새북(塞北)을 통일하고 산서 북부의 수백 리를 손에 넣었으며, 성락․평성(平城) 등에 성을 쌓았다. 이리하여 탁발국가는 중원의 지배자로서 제1보를 내디뎠으며 이 시기에 다수의 한인을 정권 안에 끌어들여 정치․군사 양면에서 활약하게 하였다.
다음으로 십익건(什翼犍) 시기에는 관료제가 정비되었다. 십익건 또한 한인사대부에게 정책을 맡겼으나 대인의 자제 다수를 근시(近侍)직책에 충당했다. 의로의 실패를 거울삼아 왕권과 부족세력과의 조화를 꾀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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