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조사,연구
- 최초 등록일
- 2009.12.10
- 최종 저작일
- 20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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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창덕궁을 조사 연구한 자료입니다.
목차를 참고해 주세요. 사진자료도 첨부되어 있습니다.
목차
1. 개관
2. 창덕궁의 주요 건물들
1) 돈화문(敦化門)
2) 인정전(仁政殿)
3) 인정문(仁政門)
4) 선정전(宣政殿)
5) 대조전(大造殿)
본문내용
1. 개관
태종 5년(1405) 준공된 창덕궁은 조선시대 두 번째로 지은 궁궐이다. 경복궁은 태조가 짓고 이를 중심으로 종묘와 사직이 배치되어 한양이 설계되었기 때문에 가장 권위가 있었지만 조선조 국왕이 실제 가장 오래 머문 정치 생활공간은 경복궁이 아니라 창덕궁과 그에 가까운 창경궁이었다.
조선전기 계속해서 증축을 거듭하던 창경궁은 선조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대부분 불에 타버렸다. 선조 41년(1608)에야 복구되기 시작해 광해군2년(1610)에 마무리된 창덕궁은 뒤이은 인조반정(1623)으로 대부분의 전각이 다시 소실되었다. 인조 25년(1647) 재차 중건이 시작되었는데, 이때 광해군 때 인왕산 아래 지어놓은 인경궁(仁慶宮)의 전각을 옳겨 지었기 때문에 5개월만에 완성을 보았다. 숙종 30년(1705) 반청숭명(反淸崇明)의 상징으로 대보단(大報壇)이 세워졌으며, 정조 시기 규장각(奎章閣)이 설치되었다. 순조 33년(1833) 희정당과 대조전 등 내전의 많은 전각이 화재로 사라졌으며, 헌종 12년(1846)에는 후궁들을 위한 낙선재 일곽이 조성되기도 하였다.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 때 구식 군인들이 궁궐을 침범하여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이곳에서 도망치기도 하였으며, 고종 21년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청나라군과 일본군이 이곳에서 전투를 벌였다. 1910년 8월 29일 이른바 한일합방조약이 창덕궁 인정전에서 체결되었다. 창덕궁의 마지막 주인인 순종은 1929년까지 이곳의 주인으로 살았으나 일제강점시기 창덕궁이 놀이공간과 통감부 간부들의 연회장으로 변질되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일제 강점시기 궁궐의 여러 전각들이 헐려 자동찻길로 변하는 등 많은 건물들이 위치와 용도 등이 변질되었다. 다만 19세기초 궁궐의 모습을 상세하게 그린 『동궐도(東闕圖)』를 통해 과거의 모습을 복원 중에 있다.
참고 자료
이덕수, 2004 『(新)궁궐기행』, 대원사.
최종덕, 2006 『창덕궁 : 조선의 참 궁궐』 , 눌와.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 - 서울』, 돌베개.
한영우, 2006 『 (조선의 집) 동궐에 들다』, 열화당.
한영우, 2003 『창덕궁과 창경궁』, 열화당.
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www.cha.go.kr/
창덕궁 홈페이지 http://www.cdg.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