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탈춤 - 해석 및 내용정리 / 전문있음
- 최초 등록일
- 2009.12.17
- 최종 저작일
- 20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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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봉산탈춤 - 해석 및 내용정리 / 교과서수록된 전문있음
목차
1. 원문
2. 감상 및 풀이
3.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의 ‘봉산탈춤’
4. 의문점
본문내용
3) 봉산탈춤의 주제의식
봉산 탈춤은 벽사의식무(壁邪儀式舞)인 사상좌 춤으로 시작해서 할미의 원혼을 해원시키는 지노귀굿으로 끝나는 제의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파계승을 풍자하여 불교의 관념적 초월주의를 비판하고, 양반과 노비 사이의 신분적 갈등을 드러내며, 여성의 억울한 죽음을 통해 가부장적 사회의 모순을 고발하는 주제 의식으로 조선 후기의 사회상과 의식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비판 정신은 단순한 갈등과 대립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두 대상 사이의 화합을 추구한다는 정신도 있다.
4) 봉산탈춤의 전승과정
봉산 탈춤은 황해도 지방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해서(海西) 탈춤 중에서 대표적인 탈춤으로 전승되어 왔다. 해서 탈춤 중에서 오늘날까지 전해지거나 대본을 채록(採錄)할 수 있는 것은 봉산 탈춤 이외에도 강령 탈춤(康翎 탈춤 : 중요 문화재 제 34호)과 해주(海州) 탈춤이 더 있다.
봉산 탈춤은 원래 황해도 봉산 구읍(지금의 봉산군 동선면 길양리)에서 연희되었던 것이나, 1915년 행정기관의 이전과 함께 사리원으로 자리를 옮겨서 놀아지게 되었다.
이 탈춤이 황해도의 대표적 탈춤이 된 것은 18세기경이라고 하며, 당시의 주동적인 중흥자로서는 안초목(安草木, 또는 安첫목[初目])의 이름이 전해지는데, 그는 전남의 어느 섬에 유배되었다가 돌아온 후 나무탈을 종이탈로 바꾸는 등, 이 놀이를 많이 개혁하였으며, 또 그 후 안초목과 같은 이속(吏屬)들이 단체를 만들어 (봉산탈춤에는 어느 탈춤보다도 한시(漢詩) 구절의 인용과 반어(反語)등이 많은데 이것은 지방의 이속들이 세습적으로 전해 왔음을 방증한다), 상인들의 후원 아래 전승되어 온 것으로 전해진다.
이 놀이는 세시 풍속의 하나로 5월 단오날 밤 모닥불을 피워 놓고 연희되며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5월 단오에 노는 것은 조선조 말 이래의 일이며, 그 전에는 4월 초파일에 놀았다고 한다. 아마도 이것은 고려 시대의 연등(燃燈) 행사의 전통을 이은 결과인 것 같다. 또한, 원님의 생일이나 그 부임날 같은 관아의 경사나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놀이로서도 특별히 연희되었다 한다. 1930년대 말까지도 연희되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일시 중단되었다가 지금에 이르고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