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왕권과 신권의 상반관계
- 최초 등록일
- 2009.12.28
- 최종 저작일
- 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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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시대 왕권과 신권의 관계에 관한 내용입니다.
목차
《목차》
-서론
-본론 : 조선 초기의 중앙집권적 관료체제
재상들의 권력 강화
왕권과 신권의 타협의 산물, 경국대전
: 조선 중기의 당쟁과 왕권의 상반관계.
: 조선 후기의 세도정치.
-결론 : 조선 시대 왕권과 신권의 변천과정과, 의의.
본문내용
- 조선 초기 사회는 중앙집권적 사회였다.
고려 말에 와서 국정이 퇴폐하고 법령이 문란해지자 공양왕 4년(1392)9월에 정몽주가 명나라 <대명률>과 원의 지정조격을 참작하여 신률을 만들어 왕에게 바쳤다. 하지만 고려의 멸망으로 정몽주의 신률은 끝내 법전으로서 그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태조 이성계는 즉위교서에서 법률을 마련하여 국정은 모두 법에 따라 처리함으로써 고려의 전폐를 결코 밟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즉 새 왕조 조선은 건국 직후부터 국왕이나 권신의 자의에 의한 인치(이탈적인 통치행위라고 비판)를 배제하고 법에 근거한 통치, 즉 법치주의를 지향하였다. 이같은 의지에 따라 새 왕조 조선은 기본법전을 편찬하여 통치의 기본 도구로 삼으려 했다.그 노력의 산물이 바로 <경국대전> 이다. 통치기반을 마련하는 사업은 성격상 국정운영을 왕권 중심으로 하느냐, 신권 중심으로 하느냐의 논란을 불러일으켜 단기간에 이루어질 수 없었다. 물론 그 와중에 여러 차례 정변이 일어났음은 잘 알려진 대로이다.
건국 직후 도평의사사를 비롯하여 문하부, 삼사, 중추원이 국가권력의 핵심기구가 되었다. 문하부는 국가의 일반 행정 업무를 총괄하고 삼사는 재정을 담당하며, 중추원은 왕명의 출납과 군사에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였다. 이 때의 조직개편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도평의사사였다. 도당이라고 불리었던 도평의사사는 건국 직후 조선왕조의 최고위 인사들이 모여 국가의 중대사를 의논하는 곳이었다. 이때 최고위 인사라고 하면 바로 개국공신들을 말하는 것으로, 조선의 새로운 권력자인 이들은 배극렴, 조준, 정도전 등 모두 52명에 달했다. 그런데 도평의사사는 고려시대 통치체제의 기본골격을 그대로 본받은 것이었다.
<결론>
조선 시대 정치의 큰 특징은 바로 신권이 강력하다는 것인데, 조선은 문치주의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에 아마도 신료들의 권한이 더 크지 않았는가 생각이 된다. 문치주의에 기반을 둔 국가체제에서 학문적인 우월성을 점유한 신료들은, 태생적으로 왕권을 압도할 수 있는 기반은 이미 갖추어져 있었다고 보아진다.
조선 후기로 올수록 왕권은 전기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약해지고 나중에는 신료들이 임금을 택하는 세도정치의 모습까지 보여진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신권이 강해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어떻게 보면 이는 조선사회에서 문치주의가 자리를 확고히 잡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숙종과 같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왕도 찾아 볼 수 있으나, 숙종의 경우도 상당한 권력을 갖춘 한 정파를 이용해서 다른 정파를 치는 방법을 이
참고 자료
『출처』
- 살아있는 한국사 : 3권 ( 사림의 등장에서 대한제국의 멸망까지 )
이덕일 저.
- 주제로 보는 한국사 : 조선편. 이희근 저.
- 출처: http://www.royalmuseum.go.kr
-조선시대 당쟁사
-한국사 ( 32 : 조선후기의 정치)-조선 편찬 위원회
-한국사의 이해- 유완상, 박천우, 김희만 공저
-(교양인의)한국사 - 김춘남 저
- 각주 : 네이버 백과사전, 및 살아있는 한국사 & 주제로 보는 한국사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