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는 왜 삼국에 들지 못했나 임나일본부 기마민족설
- 최초 등록일
- 2010.03.03
- 최종 저작일
- 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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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론] 가야는 그동안 ‘신비의 왕국’, ‘잊혀진 왕국’이라고 불리면서 베일 속에 가려진 존재로 여겨졌다. 사실 고대사회에서 가야는 주역보다는 비주류로써 여겨지면서 연구에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 가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가야에 관한 고고학적 유물들이 하나 둘씩 발굴되면서 가야사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게 되었다.
목차
서론
본론
- 가야는 왜 삼국에 들지못했나
-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 기마민족설에 대해
결론
본문내용
가야는 그동안 ‘신비의 왕국’, ‘잊혀진 왕국’이라고 불리면서 베일 속에 가려진 존재로 여겨졌다. 사실 고대사회에서 가야는 주역보다는 비주류로써 여겨지면서 연구에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 가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가야에 관한 고고학적 유물들이 하나 둘씩 발굴되면서 가야사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 발표에서는 가야를 중점으로 하여 가야가 삼국에 들지 못한 이유와 임나일본부설, 기마민족설에 대해 알아봄으로써 가야사에 대해 자세히 접근하도록 하겠다.
Ⅱ. 본론
1. 가야는 왜 삼국에 들지 못했나
1) 역사서에 등장하는 가야의 모습 - 신라와 대등했던 가야
① 『삼국사기』<신라본기> 파사니사금 23년(102) 8월조
23년 가을 8월에 음즙벌국과 실직곡국이 영토를 다투다가 왕에게 와서 판결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왕이 난처하게 여기고 ‘금관국 수로왕이 연로해 아는 것이 많으리라’고 생각해서 수로왕을 불러 물었다. 수로가 의견을 내어, 다투던 땅을 음즙벌국에 귀속하도록 하였다. 이에 왕이 6부에 명해 모여서 수로왕을 위해 향연을 베풀도록 하였다. 5부는 무도 이찬으로서 접대하게 했는데 유독 한지부만이 지위가 낮은 이가 접대하게 하니, 수로가 노하여 종 탐하리를 시켜 한지부주 보제를 죽이고 돌아갔다. 탐하리는 달아나 음즙벌국 타추간의 집에 숨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그 종을 수색했으나, 타추가 보내지 않았다. 왕이 노하여 군사를 몰아 음즙벌국을 치니, 음즙벌주와 그 무리가 스스로 항복하였다. 실직과 압독 두 나라 왕도 와서 항복하였다.
이 설화에는 가야 여러 나라의 맹주 노릇을 하던 금관국(김해 가락국)이 영남일대에서 어떤 정치적 위치에 있었는지를 알게 해주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첫째, 가야가 신라왕에게 신라의 문제를 의뢰받아 해결해 줄 정도로 대외적인 권위가 있었고, 둘째, 수로왕이 신라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을 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신라가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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