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0세기 하대 신라와 후삼국의 성립
- 최초 등록일
- 2010.03.16
- 최종 저작일
- 20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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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9~10세기 하대 신라와 후삼국의 성립
목차
1. 머리말
2. 신라의 쇠퇴
3. 후백제의 성립
4. 후고구려의 성립
5. 후삼국의 쟁패
6. 후삼국의 통일
7.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사평
8. 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1. 머리말
얼마 전 텔레비전 드라마로 “태조 왕건”이라는 프로가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게 생각이 난다. 이 프로가 한참일 때 군 생활을 하고 있던 나로서는 관심은 있었지만 별로 볼 기회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후삼국에 대한 내용을 학교 다니면 대충 배운 나로서는 한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외세인 당나라의 힘까지 끌어들이고 고구려의 드넓은 옛땅까지 잃어 가면서까지 어렵게 통일을 이루었던 신라가 다시 세 국가로 나누어지고 한반도를 수십 년 간 민족 전쟁의 소용돌이로 빠뜨리는지,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알 수가 없었고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난 이 미흡한 글을 통하여 이런 자그마한 의문과 그때의 시대적인 상황을 조금이나마 자세하게 이해하길 기대해본다.
2. 신라의 쇠퇴
고구려, 백제, 신라의 분립으로 세 개의 문화와 생활로 나뉘어 있던 한반도와 사람들을 하나로 융합시켜 그로 인해 단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던 신라였다. 하지만 신라 사회는 말기로 오면서 내부 모순의 격하에 따라 급속히 허물어지기 시작하였다. 귀족, 절 등에 의한 대 토지 장악은 정전 제를 파괴시키고 양인 농민들을 몰락시켰다. 또한 귀족 사이에 권력다툼이 심하게 일어난다. 780년 상대등 김양상이 혜공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이후 신라멸망에 이르기까지 150여년 동안 무려 20여명의 왕이 뒤바뀌는 중앙 진골 귀족들 사이에 치열한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는데 이는 후기 신라의 통치 체제를 거의 마비 상태로 몰아 넣는다.
한편, 농민들의 부담을 가중시키면서 신라 사회를 멸망의 늪으로 빠뜨린 또 하나의 요인은 지배층의 사치와 부패, 타락이었다. 843년 흥덕왕 때에는 사치 금지령까지 반포하여 이를 막아 보려 하였으나 지배층의 사치와 부패, 타락은 결코 수그러지지 않았다.
농민들은 날로 가혹해지는 지배층의 억압과 수탈에 맞서기 시작하였다. 9세기 후반, 특히 진성 여왕(887~897)대에 이르러 농민들의 투쟁은 농민 전쟁의 수준으로까지 발전하였다. 또 9세기 전반의 농민 투쟁이 주로 서부 지방에서 전개되었다면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농민 투쟁이 전국을 휩쓸었다.
참고 자료
종횡무진 한국사, 남경해, 그린비, 2001
새로읽는 삼국사기, 정구목편저, 동방미디어, 2000
우리역사 이야기, 조성오, 1993
한국사 새로보기, 전국 역사교사 모임, 1998
인터넷-디지털한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