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東學)과 갑오농민전쟁
- 최초 등록일
- 2010.03.20
- 최종 저작일
- 20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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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동학(東學)과 갑오농민전쟁
목차
1.시대적 배경
2.동학의 발전과정
1)제1기
2)제2기
3)제3기
4)제4기
3.동학의 기본사상
1)인내천
2)사회사상
4. 동학농민전쟁의 전개
5. 동학농민전쟁의 결과
*참고문헌(參考文獻)
본문내용
1. 시대적 배경
동학(東學)이 형성되기 시작했던 19세기 조선후기사회는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과 지배층의 수탈의 심화되면서 지주 전호제를 확대하고 농민층의 몰락을 가속화 시키고 있었다. 동학이 형성되었던 19세기에는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시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말은 밖으로나 안으로나 모두 혼란스러웠던 시대로 조선 후기로 넘어가면서 내적으로는 순조 때부터 이어져온 세도정치, 전제의 문란, 과거제도의 타락으로 인해 혼란이 정점에 이르렀고 외적으로는 서양의 사상과 과학적인 세계관이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다. 특히 개항 이후에 여러 개혁사업 및 대외교역의 전개는 지배층의 농민층 수탈을 오히려 심화시키고 있었다. 더구나 개항이후의 사태는 농민들의 몰락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일본의 상인들은 일본으로 수출할 쌀을 확보하기 위해 농민들에게 고리대의 함정을 파게 하였고 전국 각지를 돌면서 쌀의 이출에 노력하고 있어서 지방장시를 중심을 이루어지고 있었던 농민층들의 재생산체계를 위협하고 있었다. 한편 서구공장제품의 유입으로 인한 전래수공업의 몰락은
5. 동학농민전쟁의 결과
개화파 정권이 일본에 의존하여 무력으로 농민군을 진압하였기 때문에 조선 사회의 근대화는 양반 지주인 관료가 외세의 간섭을 받는 가운데 진행되어야 했다. 이는 농민이 주도가 되어 근대 개혁을 추진하려는 시도가 좌절되었음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열기는 꺼지지 않아 민중의 사회개혁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더 나아가 의병전쟁의 추진력이 되어 반침략 항일 투쟁의 역사적 기반이 되었다.
농민군의 목표는 봉건적 사회구조의 타파와 외세를 배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개혁의 구상이 준비되어있지 않았다는 것, 또 집권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이나 집권 이후의 개혁에 관한 구상이 없었다는 것은 오랫동안 봉건적 윤리의 세뇌를 받아 왔던 농민층에게는 당연한 것이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해야할 점은 이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들이 다양하다는 것이다. 지배층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는 “동학난(亂)” 의미를 부여하고, “동학농민혁명”은 농민이 주도하는 동학혁명이라는 점에서, 갑오농민혁명은 동학이 빠진 농민들의 혁명이라고 부른다.
우선 “혁명”은 바라다트(Leon P. Baradat)의 정의에 의하면
참고 자료
신복룡,『동학사상과 갑오농민혁명』,2006, 선인
김종수,『뿌리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근대』, 솔, 2006
편집부,『한국사 특강』,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동학농민혁명과 사회변동』,한울,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