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본관제
- 최초 등록일
- 2010.03.20
- 최종 저작일
- 20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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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의 본관제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序文
本文
1.본관제의 유래
2.본관제의 목적
3.본관제의 특성
1)본관간의 등급차이
2)영역 규제
3)중앙세력과과 지방세력간의 타협
結論
參考文獻
본문내용
序文
본관 봉화(奉化). 자 종지(宗之). 호 삼봉(三峰). 1342년 고려 충혜왕 3년 경상북도 영주에서 밀직제학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장성하여 목은 이색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당시 동문으로 정몽주, 윤소종, 박의중, 이숭인 등이 있었다. 1362년(공민왕 11) 진사시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자료1>
여자 친구의 집을 방문했을 경우 여자 친구의 아버님이 간단한 집안사항을 물어 오실 수 있습니다. `자네는 본관이 어딘가?` 의 대답은 예를 들면 `김해 김가 입니다.` 로 대답해야 합니다. 까다로우신 분이시라면 `김해 김씨입니다.` 라고 대답했을 경우 탐탁치 않게 여기실 것입니다.
<자료2>
<자료1>은 백과사전에서 조선 건국공신 정도전을 검색한 것이고 <자료2는> ‘여자 친구 집을 방문할 경우’ 라는 키워드로 지식 사이트를 검색한 결과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두 자료에서 모두 本貫이라는 단어가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가 의례 말할 때 ‘옛날’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고려, 조선을 넘어서 현대까지에도 본관이라는 단어는 사용되고 있다.
本貫은 중국에서는 이미 당나라 이전부터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도 삼국시대부터 본관을 사용하였다는 주장이 있으나,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사용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오늘날은 그 중요성이 예전보다 덜 하게 되었지만 본관, 그러니까 본관제도를 제정할 당시에 그 본관이라는 것은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단순히 사전적 정의대로 ‘개인의 시조가 난 곳 또는 성(姓)의 출자지(出自地).’ 라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모든 제도가 만들어 지는 데는 그 이유가 있다. 통일신라 이후 지방에서 난립하는 호족세력을 규합하고 고려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는 본관제도의 역할이 매우 컸다. 본관제는 ‘조상의 고향을 말해주는 것’ 이상의 고려왕조가 실질적인 민족 통합 국가를 이룩하여 5백년간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던 제도적 기반이 되었다. 고려건국에 참여했던 수많은 地方 세력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절하여 사회적 통합, 즉 궁극적인 민족 통합을 이루었던 제도장치 인 것이다.
참고 자료
단행본
5백년 고려사, 박종기, 푸른역사, 1999
백과사전
두산백과사전
인터넷
네이버 www.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