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 작가론과 작품론
- 최초 등록일
- 2010.04.20
- 최종 저작일
- 20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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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만해 한용운의 작가론과 작품론입니다. 리포트로 유용할 것입니다.
목차
1. 작가 연보
2. 한용운, 시 이해
3. 한용운, 시 읽기
4. 문학사적 의의
본문내용
1. 작가 연보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한 응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이고 자는 정옥(貞玉), 속명은 유천이며 득도 때의 이름은 봉완,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萬海)이다. 1884년 동리의 사설 글방에서 한문을 배웠고, 1887년 《서상기(西廂記)》를 독파하고 《통감(通鑑)》의 뜻을 읽어냈으며, 《서경(書經)》을 통달하였다. 1892년 전정숙과 결혼하였고,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 홍성군 일대에 번지고 이 때 아버지 한응준은 관군의 입장에서 농민군을 진압하였다. 1896년 글방의 스승이 되어 어린 아이들을 가르쳤고, 1899년 강원도 설악산의 백담사 등지를 전전하였다. 세계 여행을 계획하고 설악산에서 하산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갔다가 곧 되돌아왔다. 1904년 고향 홍성에서 머물다가 5, 6월 경 설악산 백담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그리고 맏아들 보국을 낳았다. 1907년 강원도 건봉사에서 최초의 선(禪) 수업을 성취했다. 1908년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물을 시찰하고 동경 조동종 대학에서 불교와 서양철학을 청강하고 유학 중이던 최린과도 사귀고 10월에 귀국하였다. 서울에 ‘경성 명진 측량 강습소’를 개설하고 소장에 취임하였다. 1910년 ‘조선불교유신론’을 백담사에서 탈고하고 1911년에 박한영, 김종래 등과 순천 송광사, 동래 범어사에서 ‘승려 궐기대회’를 개최하고 한일 불교 동맹 조약 체결을 분쇄하고자했다. 만주로 망명하여 만주 지방 독립군들에게 민족독립사상을 북돋아주고 망명 중이던 박은식, 이시영, 윤세복 등 독립지사들과 만났다. 한 때 우리 독립군에게 일진회원으로 오인되어 저격당하기도 했다. 1913년에 불교 강구회 총재에 취임하고 박한영, 장금봉 등과 불교 종무원을 창설하였다. 통도사 불교 강사에 취임하였고 《조선불교유신론》을 발행하였다. 1914년에 조선불교회 회장에 취임되었고, 1915년 조선 선종중앙포교당 표교사에 취임되었다. 1917년 12월 오세암에서 좌선하던 중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진리를 깨우쳤고, 1918년에 월간지 《유심(惟心)》을 창간하여 편집겸 발행인이 되었다. 1919년 최린, 현상윤 등과 조선독립을 숙의하다
참고 자료
-한용운, <한용운 시집*님의 침묵>(청년사, 1986)
-이종대 외, <우리시대의 시집, 우리시대의 시인>(계몽사, 1997)
-김광길, <현대시의 비평적 연구>(국학자료원, 1994)
-오탁번, <현대시의 이해>(청하, 1990)
-신용협 편, <한국 현대시의 대표작품 연구>(국학자료원, 1998)
-이숭원, <20세기 한국시인론>(국학자료원,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