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황사
- 최초 등록일
- 2010.06.02
- 최종 저작일
- 20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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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분황사에 대한 배경 및 정리
목차
Ⅰ. 들어가며
Ⅱ. 내용
ⅰ. 분황사
- 건립 배경
- 건물 구조로 본 가람배치
- 출토 유물
- 자장대사와 원효대사
ⅱ. 모전석탑
- 분황사 모전석탑
- 후대 석탑에 끼친 영향
- 분황사 모전석탑의 특징
- 전탑과 모전석탑의 비교
Ⅲ. 정리하며
Ⅳ. 참고문헌 및 사이트
본문내용
분황사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각각 언급하고 있으며, 두 사료에서의 시기가 일치한다. 『삼국사기』에서는 ‘선덕왕 3년(634) 정월에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고치고 분황사를 완성했다’고 하였다. 『삼국유사』에서도 ‘분황사는 전불시대 칠처가람(前佛時代 七處伽藍) 중의 하나로서 용궁(龍宮)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선덕왕대 갑오년(634)에 창건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가람의 전체 규모에 따르는 공기(工期)를 감안하면, 진평왕 말기부터 불사(佛事)를 시작했거나 아무리 늦어도 선덕왕 즉위 이후에는 착공을 해야 즉위 3년째 되는 해 정월에 완공이 가능했을 것이다. 더불어 ‘분황(芬皇)’이라는 명칭이 내포하는 의미, 완공과 동시에 단행된 개호(改號)를 관련지어 살펴보면, 창건 당시의 분황사는 신라 최초의 여왕이었던 선덕왕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던 사찰로 판단된다.
고려시대에는 숙종 6년(1101)에 왕은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 의상에게 대성원교국사(大聖圓敎國師)라는 시호를 각각 내리고 유사로 하여금 주처(住處)에 비를 세우고 덕을 기리라는 명을 내렸으며’, ‘화쟁국사비는 명종대(1170~1197)의 한문준에 의하여 (분황사에) 건립되었다’. 이 비석의 비신(碑身)은 멸실되고 비부(碑趺)만 잔존하는데, 현재 경내의 석탑 부근에 놓여 있다. 비부 상면에 음각된 추사(秋史) 김정희의 글씨로 미루어보면, 비신은 최소한 19세기 전반 이전에 멸실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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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특별전 芬皇寺 출토유물}. 그라픽네트, 2006.
- 강우방·신용철. {한국 美의 재발견 5 - 탑}. 솔출판사, 2003
- 분황사 공식사이트 : http://www.bunhwangs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