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est kingdoms-yoruba,oyo,benin족등
- 최초 등록일
- 2010.06.02
- 최종 저작일
- 2009.01
- 8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500원
소개글
아프리카 숲속의 여러 종족들에 관한 정보와 당시 현황
목차
요루바족(The Yoruba)
일레이페(Ile-Ife)
오요(Oyo)
요루바왕국의 마지막
베냉 (Benin)
베냉의 놋쇠주조
베냉, 무역을 통해 강성하다
니제르의 동쪽
본문내용
요루바왕국의 마지막
그러나 가난한 지역사회들과 열대우림안의 넓은 지역들은 오요의 통치자들이 다스리기에는 너무 넓었다. 약 1750년 이후, 왕국은 분열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로, 상대적으로 더 먼 지역들이 독립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1789년, 다호메이의 왕은 더 이상 공물을 바치는 것을 거부했다.
두 번째 이유는 유럽인들과의 해안에서의 노예무역 때문이었다.
이것은 18세기에 증가하고 있었고, 노예무역과 함께 다른 이유들로 북쪽과의 오랜 무역관계는 쇠퇴하고 있었다.
그러나 , 오요는 노예무역으로 많은 것을 얻기엔 너무 북쪽에 있었고 그래서 점점 더 가난해지고 해안과 가까운 다른 중심지 보다 덜 중요해 졌다.
세 번째로, 알라핀의 지도층부하들 중 일부가 반역을 하기 시작했다.
1820년에 시작된 내전에서 특히 카칸포인 아폰쥬(Afonju)는 알라핀을 타도하기 위해 하우사의 정복자인 풀라니족(Fulani)의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풀라니족은 아폰쥬로 표적을 바꿨고, 그는 전쟁 중 죽었다.
그리고 풀라니족은 오요의 북쪽 경계지역인 일로린을 차지하고, 요루바족들을 노예가 되는 것과 북쪽의 니제르로부터 보호했다.
요루바 인들은 유럽인에게 팔기위해 노예가 필요했고, 그래서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요루바의 본거지인 이페조차 지금은 다 파괴되었다.
1837년 오요는 해안이 가까운 새로운 지역으로 남하했다.
그러나 오요와 라고스(Lagos) 사이에 있는 이바단(Ibadan)이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비록 숲속의 새로운 중심지의 요루바족이 풀라니족을 바다 만에 머무르게 하느라 애썼지만,
늦은 19세기에 유럽 상인들과 선교사들이 내륙으로 들어왔을 때, 그들은 약해지고 분열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