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글쓰기 - 박에스더
- 최초 등록일
- 2010.06.03
- 최종 저작일
- 20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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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박에스더에 관한 3자의 입장에서 쓴 픽션을 가미한 일기?
목차
없음
본문내용
1886년 11월 23일
일 년의 마지막 계절인 겨울이 성큼 다가서고 있다. 겨울이 오면서 나는 신학문을 공부하게 된지 일 년이 되어가고 있다. 아…… 보다 시적으로 쓰고 싶었는데 나는 아직 부족한가.
오늘 우리 반에 새로운 친구가 왔다. 우리 학교의 네 번째 학생이다. 이름은 김점동(金點童). 다른 여자아이들처럼 자(子)나 옥(玉), 순(順) 등을 쓴 것도 아닌데 그저 이름이 촌스럽고 웃기다. 내 이름은 참 예쁜데! 박인화(朴仁花). 신학문에 깨여있으셨던 할아버지께서 여자도 사람이니만큼 이름이 있어야 한다고 하시며 지어주신 이름이다. 예쁘게 자라서 꽃이 되라하시며 더불어 인(仁)을 갖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지어주신 이름이라 하셨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항상 인자한 웃음을 지어주셨고 오빠랑 나를 차별해 대하시던 할머니를 타박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요즘 들어 여자들도 이름을 가지기는 하는데,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인지 자(子)를 넣거나 순(順), 숙(淑), 정(貞)처럼 정절이나 순종을 드러내는 글자를 많이 사용한다. 그런 이름을 볼 때마다 여자는 어려서는 아비에게, 혼인 후에는 남편에게, 그 후에는 아들에게 속한다는 구식의 사상에 속박되어 있는 것 같아 기분이
1910년 4월 13일
큰 별이 졌다. 에스더가 하나님 곁으로 갔다. 그동안 몸 사리지 않고 바쁘게 움직이더니 남편의 사인이었던 폐결핵으로 역시 생을 마감했다.
에스더는 1903년까지 나와 함께 보구여관에서 일했는데 선교회에 보낼 연차보고서 만드는 일을 도와가며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년에 2천에서 4천건 정도의 진료를 했다니…… 게다가 병원일이 끝나는 저녁이나 일요일에도 진료를 했으니 에스더가 돌봐준 환자가 도대체 몇이나 될지 헤아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1903년에 우리 병원의 담당의사인 카터 선교사님께서 안식년에서 돌아오시자 에스더는 황해도와 평안도의 여러 촌락에까지 순회 진료를 했다. 가마가 들어갈 수 없는 곳에서 당나귀를 타면서까지 한국인 부인전도사들과 함께 미신타파와 복음전도, 질병치료를 위해 힘썼다.중간 중간 다.오는 편지에서 에스더는 힘든 내색 하나 없이 환자의 정신과 육체를 치료하는 기쁨에 가득 차 있었다.
1906년부터는 홀 선생님과 함께 광혜여원에서 환자를 진료하면서 홀 선생님이 만드신 맹아학교에서 영어교재를 번역하기도 하고 여자성경학교에서 성경과 의학에 관한 강의를 하기도 했다. 이렇게 바쁘게 지내다 보니 여름에는 병이 생겨 그나마 두어 달을 쉬었다.
그녀의 장례식때 추도사를 하려고 나의
참고 자료
우리 나라 여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2.이배용외.1999
한국사이야기19.이이화.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