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택리지의 소개 : 이중환의 생애와 저술 배경, 조선 시대의 지리학 발달 정도, 택리지의 부분별 요약정리
목차
1. 택리지 요약
2. 이중환의 생애와 저술 동기
3. 조선시대 지리학의 발달
4. 택리지의 의의와 문제점
본문내용
이중환의 생애는 신임옥사에 연루되어 먼 섬으로 유배되던 시기를 기점으로 하여 그 이전의 소년기와 관료생활기, 그 이후의 유배생활과 30여년 동안의 방랑·은둔생활기, 그리고 영조29년(1753년) 이후의 명예회복기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명예회복은 그가 죽기 불과 3년 전이었으므로, 이중환의 생애는 크게 신임옥사 이전의 전반기와 그 이후의 후반기로 나눌 수 있다.
이중환의 본관 여주(驪州). 자는 휘조(輝祖). 호는 청담(淸漂) · 청화산인(淸華山人)으로 참관 진휴의 아들이다. 그의 출생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어린 시절을 현재의 공주 백마강 북안에서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이중환이 14세에 강릉도호부사로 부임하는 부친을 따라 강원도의 운교에서 대관령을 넘어가며 그 지방을 예리하게 관찰한 내용이 택리지의 강원도 편에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미루어 부친을 따라 어릴 적부터 여러 지역을 돌아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대부의 가정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이중환은 1713년(숙종 39)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19년 김천도찰방을 거쳐, 1722년(경종 2)에 병조정랑이 되어 지방의 지리적 정보를 다루었다. 영조가 즉위하자 목호룡의 당여로 구금되어 1725년(영조 1) 2월부터 4월까지 네 차례나 형을 받았고, 이듬해 12월에 섬으로 유배되었다가, 그 다음 해 10월에 석방되었으나 그 해 12월에 사헌부 탄핵을 받아 다시 유배되었다. 그 뒤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일정한 거처도 없이 전국을 떠돌아다니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이중환은 전라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우리 나라 전역을 두루 답사하였는데, 당시 전국의 인심, 풍속 및 물화의 생산지 · 집산지 등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 방면에 특히 관심을 가지게 된 동기는 관직에서 물러나 사대부들이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는 데 있었다. 그가 가장 좋은 곳을 선정하는 기본 관점은 인심이고, 산천이 좋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교역이 좋은 곳이었는데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쓴 저서가 바로 『擇里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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