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한국근현대사- 좌우합작운동 과제
목차
Ⅰ. 서론
Ⅱ. 좌우합작운동의 배경과 전개과정
1. 좌우합작의 배경: 미소공위의 결렬
Ⅲ. 좌우합작운동의 추진의도
Ⅲ.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좌우합작운동은 1946년 3월 20일부터 5월 8일까지 열렸던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직후인 5월 25일에 분열된 국내정국을 통일한다는 명분으로 미군 점령지역인 남한에서 좌우합작위원회가 발족하면서 시작되었다. 운동의 주체세력은 김규식과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중간 좌․우파들이었다. 이 운동에는 미군정과 북한지역의 세력 등 많은 세력이 직간접으로 간여했다.
1946년 가을 위원회는 남한 좌우익간의 조정을 거쳐 통일원칙인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좌우양익의 실시들이 이탈해 버려 좌우가 각각 배척하는 중간파만의 합작으로 귀결되었으며 1947년 12월 6일 좌우합작위원회가 공식 해제를 선언함으로써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지금까지 좌우합작운동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다. 좌우합작운동은 해방 직후의 기본적 대립관계를 좌우대립에서 구하는 일련의 연구자들에게 일찍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강만길, 안정애, 서중석 등은 좌우합작운동이 조공으로 대변되는 극좌노선과 이승만, 한민당 등의 극우노선 때문에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 시기의 제반 사회적 모순과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고 하면서 좌우합작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높이 평가했다. 서중석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좌우합작운동이 1차 미소공위 휴회 후 제기되는 민족적 위기의 산물도 미국의 정책 변화의 산물도 아닌, 조공의 편향된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노선에 대립하여 건준 이래 지속되어온 여운형의 선민족국가건설노선이 구체화 된 것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양동주, 정해구 등은 좌우합작운동이 미군정의 입장에서는 좌익세력에서 여운형을 끌어내어 우익세력과 중도세력을 연대시키고, 이에 바탕 하여 남한에서 대표성을 가질 수 있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설치하기 위한 공작적 차원에서 추진되었다고 한다. 한편 여운형은 온건노선인 합작노선의 일환에서 이에 참가했다. 좌우합작운동은 조공이 신전술로 전환하고, 9월 총파업, 10월 항쟁이 전개되면서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좌우합작은 좌익세력의 분열, 여운형 세력의 몰락을 초래했다는 점에서 미군정에게는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이었다고 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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