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우리 한민족의 기원과 형성과정에 관한 재고찰과 논문 고구려가 한민족사로 인식되는 과정에 대한 고찰 비교 논평
- 최초 등록일
- 2010.07.16
- 최종 저작일
- 20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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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논문 우리 한민족의 기원과 형성과정에 관한 재고찰과 논문 고구려가 한민족사로 인식되는 과정에 대한 고찰 비교 논평
목차
논문 11번.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기원과 형성과정에 관한 재고찰』요약
논문 14번. 『고구려(高句麗)가 한민족사(韓民族史)로 인식되는 과정에 대한 고찰』요약
논문 『우리 한민족의 기원과 형성과정에 관한 재고찰』과 논문 『고구려가 한민족사로 인식되는 과정에 대한 고찰』에 대한 비교 및 논평
본문내용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한민족(韓民族)이 단일 민족으로 출발하였다’고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단일 민족 개념은 수십 년 동안 국수주의적 역사 교육에 의해 심히 왜곡된 것인데, ‘단군의 자손’, ‘반만년 단일 민족의 역사’, ‘만주는 원래 우리 민족의 땅’ 등을 문자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로 인식하는 것은 결코 과학적인 역사 인식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 한민족은 한반도에 살던 여러 민족들이 장기간에 걸친 문화접변을 통해 단일 민족으로 발전한 것이다. 단일 민족은 역사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지 태초부터 주어진 것이 아닌 것이다.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는 즐문토기인데 반해,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는 무문토기이다. 즐문토기 유적과 무문토기 유적은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서로 구별된다. 즐문토기 제작자와 무문토기 제작자는 문화적으로 거리가 먼 계통에 속하는데, 한반도에 거주하던 신석기인들이 그들의 문화를 점차 발전시켜 청동기시대로 접어든 것이 아니라 청동기인들이 신석기인들을 정복하거나 몰아내면서 만주 지방에서 한반도로 진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청동기시대가 되면서 소국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청동기시대에는 빈부의 차이와 지배•피지배의 관계가 나타났고 부와 권력을 가진 정치적 지배자를 군장이라 하였다. 군장은 언어, 종교, 관습이 서로 다른 민족을 지칭하는 용어로, 청동기시대의 각 군장국가 주민들이 독자적인 문화를 향유하고 있었다면, 우리 민족은 청동기시대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보아야한다.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건국신화로 알려져 있다. 단군신화는 고려 충렬왕대에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삼국유사』보다 1300년이나 앞서 편찬된 『삼국사기』에는 단군에 대한 내용이 없다. 또한 『삼국유사』보다 1000년이나 앞선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는 물론 중국에 남아있는 어떤 문헌에도 그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종합적으로 판단할 때, 단군조선은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가 아니다. 단군조선은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가 아니다. 단군조선을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라고 볼 수 없는 이유를 세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단군조선은 고려시대 말의 시대적 필요성에서 등장한 것이다. 둘째, 단군조선이라는 실체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존재할 때에는 한반도와 그 주변에 무수히 많은 문화집단들이 산재하였다. 한반도와 그 주변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문화집단들이 단일 민족 의식을 갖고 있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