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사 16국사
- 최초 등록일
- 2010.07.30
- 최종 저작일
- 20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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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송광사 16국사에 관한 레포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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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송광사(松廣寺) 16국사(國師)
1.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2. 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 慧諶)
3. 청진국사 몽여(淸眞國師 夢如)
4. 진명국사 혼원(眞明國師 混元)
5. 원오국사 천영(圓悟國師 天英)
6. 원감국사 충지(圓鑑國師 沖止)
7. 자정국사 일인(慈靜國師 一印)
8. 자각국사 정열(慈覺國師 晶悅)
9. 담당국사(湛堂國師)
10. 혜감국사 만항(慧鑑國師 萬恒)
11. 자원국사 (慈圓國師)
12. 혜각국사 (慧覺國師)
13. 각진국사 복구(覺眞國師 復丘)
14. 정혜국사 복암(淨慧國師 復庵)
15. 홍진국사 (弘眞國師)
16. 고봉국사 법장(法藏)
Ⅲ. 16국사(國師) 설(設)
Ⅳ. 맺음말
※ 참고문헌
본문내용
지눌은 고려 의종 12년(1158년) 황해도 서흥에서 국학(國學)의 학정(學正)을 지낸 정광우와 명문출신 조씨를 부모로 태어났다. 법명은 지눌(知訥)이고 자호(自號)는 목우자(牧牛子)이며 시호(諡號)는 불일보조(佛日普照)이다. 지눌은 나서부터 병이 많아 부모가 8살 때 선승인 종휘(宗暉)에게로 출가시켰다. 이후 일정한 스승을 두지 않고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배웠는데 지조가 고매하여 무리에서 뛰어났다.
25세(1182년)에 승려의 과거시험인 승과(僧科)에 뽑혀 승선(僧選)에 들었다. 합격 직후 당시 국찰인 개성 보제사(普濟寺)에서 열린 담선법회에 참여했다. 합격 축하 행사였던 이 법회에서 지눌은 뜻밖의 돌출선언을 하고 입신양명의 길을 저버린다. 지눌은 「권수정혜결사문」을 지어 젊은 도반들에게 돌리고 당시의 타락한 불교계를 개혁하자며 동참을 독려한 것이다. 그러나 입신양명을 앞에 둔 동학도반들은 때가 이르지 않았다며 개혁동참을 거부했고, 낙망한 지눌은 훗날을 기약하며 홀로 남녘으로 내려와 정처없이 떠돌았다.
전남 창평(昌平) 청원사(淸源寺), 경북 예천 보문사(普門寺) 등지에 잠시 주석하다가 다시 발길 닿는대로 떠나는 운수행각을 되풀이 하기 8년 여, 마침내 시절인연이 도래했다고 판단한 지눌이 이곳에서 초지(初志)를 구현한 것이다. 머물 때 첫 경험을 했다.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보다가 ‘진여자성(眞如自性)’이 생각을 일으켜 육근(六根)으로 삼라만상을 견문각지(見聞覺知)하더라도 진여자성(眞如自性)은 대상에 물들지 않고 항상 자재(自在)하다‘는 구절에 이르러 깜짝 놀라면서 그지없는 환희를 맛보았다.
지눌은 28세(1185년)에 경북 예천(醴泉)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로 옮겨 대장경을 열람했다. 당시에 참선을 주로 하는 선종(禪宗)과 부처님 말씀을 따르려는 교종(敎宗)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상황에서 선승으로서 대장경을 본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지만 지눌은 선(禪)과 교(敎)가 둘이 아니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간경(看經)에 몰두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