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르트 도굴사건에 관한 레포트
- 최초 등록일
- 2010.09.11
- 최종 저작일
- 20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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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오페르트 도굴사건에 관한 레포트 입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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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868년(고종 5) 독일의 상인 E.J.오페르트가 충청도 덕산(德山:예산군)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생부 남연군 구(球)의 묘를 도굴하려다가 실패한 굴총(掘塚)사건이다. 덕산굴총사건이라고도 한다. 오페르트는 1866년 2차에 걸친 한국과의 통상요구에 실패하고 돌아갔다가, 1868년 4월 제3차 한반도답사를 계획, 한때 상하이 미국영사관에 근무한 미국인 모험가 F.젠킨스를 자본주로 하고, 프랑스 선교사 페롱을 통역관 겸 보좌관으로 대동하여 차이나호(號)에 백인 8명, 말레이시아인 20명, 한국 천도교인 약간 명, 청국인 승무원 약 l00여 명을 태우고 상하이를 출항하였다.
한국에 도착한 그들은 북독일연방(北獨逸聯邦)의 국기를 게양하고 충청도 홍주군(洪州郡) 행담도(行擔島)에 와서 정박하였다가, 구만포(九萬浦)에 상륙하여 러시아 군병이라 자칭하면서 함부로 총칼을 휘둘러 지방관헌조차도 접근하지 못하게 한 다음, 어둠을 타서 덕산 가동(伽洞)에 있는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덕산군수 이종신(李鍾信)과 묘지기 및 몇몇 주민이 이를 제지하려 하였으나 무장한 서양인을 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날이 밝아 주민들이 몰려오며 내하(內河)의 퇴조(退潮)시간이 임박해지자 이들은 관곽(棺槨)까지 파낸 것을 그대로 버려두고 구만포로 퇴각하였다.
2일간에 걸친 이 사건이 관찰사 민치상(閔致庠)에게 알려지자 즉시 군관 100여 명을 출동시켜 추적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또 경기도 영종진(永宗鎭)에 이르러 대원군에게 올리는 글을 제시하면서 영종진을 습격하다가 실패하고 돌아가 버렸다. 이 소식이 중앙에 전해지자 대원군은 양이(洋夷)의 추적을 명하는 동시에, 이러한 괴변은 필시 천주교도의 내응(內應) 향도(嚮導)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국내에 남아 있는 천주교도를 더욱 엄중히 단속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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