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 신채호
- 최초 등록일
- 2010.09.20
- 최종 저작일
- 20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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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 작가의 생애
◎ 신채호 申采浩 1880~1936
조선 말기일제강점기의 역사가언론인독립운동가. 호는 단재(丹齋). 본관은 고령(高靈). 충청남도 대덕(大德) 출생. 18세 때 전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그의 천거로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1901년 향리 부근의 문동학원(文東學院) 강사로 신규식(申圭植) 등과 계몽운동 및 신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목차
1) 작가의 생애
2) 작품을 통해 본 작가의 민족의식
3) 결론
본문내용
단재는 독립협회가 서울에서 개최한 만민공동회가 절정을 이루던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한다. 당시 단재는 내무부 문서부 소속으로 일하였는데, 이 부서에는 이상재, 신흥우, 김규식 등이 함께 있었다. 독립협회의 운동이 힘차게 진행될수록 정부의 탄압도 심해져 결국에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단재도 검거되어 투옥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다행히 신기선의 후원으로 석방은 되었지만 처음 경험한 독립협회의 운동은 단재에게 오랫동안 성균관에서 공부하게끔 하지 않았다. 1901년 단재는 고향 근처 인차리에 신규식, 신백우와 함께 문동학교를 세워 젊은 청년들을 교육하여 나갔다.
1904년 고향에 있던 단재는 이하영 등이 황무지개간권을 일본에 팔아먹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성균관으로 다시 올라와 항일성토문을 작성하고 성균관 학생들과 함께 항일성토궐기를 한다. 1905년에는 성균관 합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박사를 받았지만, 곧 고향으로 다시 내려와 계몽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황성신문`의 발행에 참여하던 장지연의 권유로 황성신문 논설기자로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황성신문에서의 단재 필치는 예리하고 강렬하여 독자들의 관심을 한데 모았고, 이후 언론인으로서의 단재활동을 가늠케하였다. 1905년 을사5조약을 비난하는 장지연의 그 유명한 `시일야방성대곡`이 황성신문에 인쇄되고 난 뒤 황성신문은 무기 정간되었다. 이러한 상황의 단재를 `대한매일신보`의 논설기자로 초빙한 사람은 그 신문의 총무를 맡고 있던 양기탁이었다. `대한매일신보`에서도 단재의 글들은 사회의 중요한 이야기 거리였다. 그 옛날 나라를 구했던 영웅들을 다시 살려내 현재의 나라를 구하려 하였던 단재는 `이순신전`, `을지문덕전`. `최도통전` 등의 글을 발표하였다. 이 글 모두는 서두에서부터 풍전등화와 같았던 나라의 운명을 건져보려는 단재의 소망이 한껏 들어간 명문들이었다.
역사가로서, 문학가로서 다방면에 걸친 단재의 재능이 돋보이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