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샤를르 드골
- 최초 등록일
- 2010.10.27
- 최종 저작일
- 20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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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샤를르 드골
목차
1. 비시정부와 자유프랑스
2.드골의 유럽재건에 대한 노력
3. 드골의 미국에 대한 외교정책
4. 드골의 탈 식민지화 정책
5.드골의 골리즘에 대한 평가
참고자료
본문내용
1. 비시정부와 자유프랑스
제2차 세계대전, 독일군은 6월 5일 공격을 재개하여 1주 이내에 파리를 함락시켰다. 무솔리니는 6월 10일 영국과 프랑스에 선전포고하고 남프랑스에 침입하였고, 6월 16일 프랑스는 항복하였다. 휴전조약은 1918년 독일이 항복할 때 사용된 열차 칸에서 1940년 6월 22일 체결되었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1차 대전 때 베르뎅 전투의 영웅이었던 84세의 페탱이 이번에는 휴전조약에 서명한 당사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페팅은 항복조건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프랑스 국토의 5분의 3은 나치 점령 하에 들어갔으며 프랑스군 포로는 독일에 그대로 수용되었다. 프랑스는 점령지역과 비점령지역으로 구분되었다. 비점령지역인 동남프랑스 지방 비시에 프랑스 정부가 들어섰다. 페탱의 비시정부는 파시스트와 전통 우익이 결합한 연립정부로서 1942년 11월 독일이 프랑스 전체를 점령할 때까지 나치의 괴뢰가 되었다.
한편 드골은 런던으로 망명하여 자유 프랑스 정부를 수립하고 연합국에 가세하였다. 망명 드골 정부의 상징은 수세기전 프랑스를 해방시키려는 전투에서 잔다르크가 사용했던 로렌 적십자였다.
페탱은 새로운 체제의 기초가 ‘일, 가족, 조국’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였고, 그것은 그의 진심이었다. 1789년의 ‘자유, 평등, 박애’는 비시가 표방하는 소위 ‘민족혁명’의 훨씬 소박한 세 기둥에 의해 대체되어야 했다. 비시 정부는 분파적이었고 타락한 정부였으며, 대부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숙원 해결에 소모하였다. 이런 숙청을 통해 비시는 프랑스를 더욱더 전통적이고 가부장적이며 권위주의적인 가치 위에 다시 세우기를 원했다.
파업과 노동조합은 금지되었고, 언론과 출판의 자유는 억압되었다. 체제는 재향 군인 연맹을 통해 여론과 접촉을 유지하려 했지만, 단 한 번의 선거도 치러지지 않았고 심지어는 정치 체제의 인정을 묻는 국민 투표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참고 자료
『드골의 外交政策論 : 골리즘을 중심으로』 허 만, 집문당, 1997.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임브리지 프랑스사 』콜린 존스, 시공사, 2001.
『서양현대사 - 제2차 세계대전에서 현재까지-』 이주영외 3명, 삼지원, 1997.
『드골평전(드골, 그의 삶과 신화)』필리프 라트, 바움,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