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캐나다 중남미의 해외동포현황 조사
- 최초 등록일
- 2010.11.03
- 최종 저작일
- 20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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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미국 캐나다 중남미의 해외동포현황 조사
목차
1.미국
1)미국으로의 이주
2)미국 내 한인의 분포 수
3)미국의 이민법
4)미국 해외동포의 최근 근황
2.캐나다
1)일반적인 개요
2)재외동포 현황
3)우리기관 및 상사 현황
4)1978년 이민법 개정 후 상황
5)07 외교통상부 재외동포현황 자료
3.중남미
1)중남미의 전체적 해외동포의 분포 현황
2)주요 국가별 현황
3)중남미 해외동포 정책의 상황
본문내용
1.미국
1)미국으로의 이주
(1)하와이로의 노동 이민
19세기 후반 우리나라는 국내·외의 혼란스런 정세로 몹시 힘든 상황이었는데, 국외로는 한반도 주변에 서구 열강이 각축을 벌이고 있었고, 국내로는 조선 정부의 부패와 무능으로 국력이 쇠약했다. 우리나라와 미국은 1882년 5월 22일 인천(제물포)에서 조·미 수호통상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 조약에는 조·미 양국 국민이 상호 상대국을 자유로이 여행하며 경제 활동도 할 수 있고 상대국에 거주할 수 있는 조항이 명시되어 있다. 이 조약을 근거로 1903년 미국 하와이로의 이민이 추진될 수 있었다.
1830년 이후 하와이의 여러 섬에 거주하던 미국인들은 설탕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당시 야생으로 자라던 사탕수수를 본격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하와이 사탕 농업이 크게 발전하면서 사탕수수 재배에 필요한 노동력이 부족하게 되었다. 미국 공사 앨런이 하와 이에 들러 농장주에게 근면하고 착실한 한인의 고용을 추천하였으며, 이에 하와이 사탕 재배자 협회 비숍이 내한해 대한제국 정부와 이민 계약 을 체결했다. 그 이전의 중국이나 러시아로의 이주와 달리 하와이 이민은 우리나라 정부에 의해 공인된 최초의 합법적 해외진출로, 처음으로 우리나라 사회의 대중 계층이 서구 사회와 접촉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
1902년 12월 22일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이민 희망자 121명은 일본 고베항에서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남자 55 명, 여자 21명 아동 25명 합계 101명만 통과되었다. 이들 중 일부 는 질병으로 입국이 허락되지 않아 결국 하와이 땅을 밟은 한인은 97 명이었다. 1차 이민이 있은 후 매월 이민선이 하와이에 도착했는데, 1903년 1,133명, 1904년 3,434명, 그리고 1905년 2,650명 등 대한제국이 일본에 외교권을 박 탈당하여 합법적 이민이 완전 폐지될 때까지 총65회 7,226명의 한인이 하와이로 이주하였다. 하와이에 도착한 한인들은 오아후, 마우이 등 하와이의 여러 섬에 있는 사탕수수 농장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모집 광고와는 달리 작업 환경이 너무 가혹해서 이민자들은 실망과 불안이 대단하였다. 이들 한인들 중 약 65%가 한글을 쓸 수 없는 문맹이었으며 특히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한인들은 교회중심으로 사회생활을 했다. 그것은 하와이 이민을 처음 주선한 사람이 대부분 미국 목사였던 관계로 이민자들 사이에는 기독교 신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들 신자들이 1903년 7월 4일 오하우 섬의 모쿨리아에 있는 농장에서 예배를 본 것이 효시가 돼 매주 예배를 보았다. 당시 기독교 선교에 목적을 둔 서양 선교사와 달리 한인교회는 기독교 신자가 아닌 일반 한인들에게도 다 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교환하는 장소로 활용되었으며 고달픈 농장 생활에 지친 대다수의 한인들을 위로하는 일종의 안식처 역할을 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