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응물 - 추야기구원외
- 최초 등록일
- 2010.11.17
- 최종 저작일
- 2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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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위응물 시인의 `추야기구원외(秋夜寄邱員外)` 작품 분석입니다.
목차
1.作者
2.內容
3.出典
4.主題
5.鑑賞
6.時形
7.选择理由
본문내용
위응물(韋應物)
위응물(737년 전후~?)은 당 경조부(京兆府) 만년현(萬年懸)의 두릉(杜陵) 사람으로 중당 때 대종(代宗) 대력(大曆) 연간(766~779)과 덕종(德宗) 정원(貞元) 연간(785~804)의 저명한 시인이었으며 강주자사(江州刺史), 소주자사(蘇州刺史) 등의 관직을 지낸 관리출신이었다. 위응물의 뚜렷한 관직과 시명에도 불구하고 역사서에는 그의 생애에 관한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는데 현재 사부총간본(四部叢刊本) <위강주집(韋江州集)>과 사고전서본(四庫全書本) <韋蘇州集> 등의 판본을 통해 그의 시 559수가 전해지고 있다.
위응물은 명문집안의 자제로 태어난 탓에 일찍이 현종(玄宗) 때 삼위랑(三衛郞)을 지내면서 황제의 시위라는 직위를 믿고 방자하고 무례한 행동을 일삼았으나 안사의 난 이후 현종이 죽자 이전의 철없던 행동을 반성하며 독서와 시작(詩作)에 전념하였다. 위응물이 문단에서 활동하던 대력(大曆), 정원(貞元) 시대는 당 왕조가 안사의 난으로 인해 쇠락의 길로 접어든 때이었으며 이러한 당의 쇠락과 맞물려 시인들 또한 더 이상 성당 때의 격정과 기상을 뿜어내지 못한 채 개인의 협소한 생활 반경 속의 소극적인 감상이나 운치만을 시로 표현했던 때이었다. 반면 위응물은 바로 그러한 문학사조 속에서 독자적인 시적 성취를 이루어냈다는 점에서 그의 시사상적인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위응물은 전대의 시인들 중에서 도연명을 가장 흠모했다. 몇 차례나 벼슬에서 물러나 도연명처럼 전원생활을 했는데 그의 성품이 시류와 영합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연유도 있다. 이러한 영향 탓에 위응물의 시는 역대로 평담자연(平淡自然)한 풍격을 지녔다는 평을 받고 있다. 위응물은 이백처럼 시에서 격정을 쏟아내지 않았으며 시상의 전개를 복잡다단하게 꾸미지도 않았으며 시어 또한 소박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언어를 주로 사용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