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논쟁- 유응부와 김문기
- 최초 등록일
- 2010.11.18
- 최종 저작일
- 20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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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사육신에 대한 논쟁중 유응부와 김문기에 대한 내용입니다
정리 잘되어있고 군더더기 없습니다
도입과 단종 복위운동의 실패 `김문기=사육신 `논리와 반박, 남은 문제들...
로 구성되어있습니다
목차
‘사육신’ 논쟁의 출발점
단종 복위 운동의 실패
‘김문기=사육신’, 논리와 반박
꼬리에 꼬리를 무는 쟁점
결론―남은 문제들
본문내용
‘사육신’ 논쟁의 출발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된 사육신묘에는 현재 여섯이 아닌 일곱 개의 묘가 조성되어 있다. 원래는 박팽년, 성삼문, 유응부, 이개의 묘가 있었지만 사육신묘 일대를 성역화하는 과정에서 사육신에 대한 논란으로 비화됐다. 사육신 중 무신이었던 유응부를 김문기로 바꾸어야 한다는 탄원에 대해 국사편찬위원회는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하위지, 유성원, 김문기의 가묘도 함께 만들어 7개의 묘가 조성되어 모셔지고 있다.
물론 “사육신의 구성을 변경한 바는 없다”는 단서는 달았지만 이 논쟁은 아직 진행형이다. 특히 일부 학자들과 충북 옥천군, 김녕 김씨 문중을 중심으로 의견이 분분하다. ‘유응부인가 김문기인가.’ 역사학도로서도 관심이 클 수밖에 없는 논쟁이다.
단종 복위 운동의 실패
우리에게 상식처럼 여겨지는 사육신은 세조 2년(1456) 상왕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사형당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를 일컫는다.
이들 중 유응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집현전 학자로 세종과 문종의 총애를 받았다. 이들은 세종의 자문에 응했을 뿐만 아니라 문종과 밤늦게까지 학문을 나누었다고 한다. 유응부 또한 세종과 문종의 총애를 받아 2품직 동지중추원사에 이르렀다. 문중이 병중에 있을 때 집현전 제신들을 불러 당시 세자였던 단종을 잘 보필해 달라 부탁한 일화도 관심을 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