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대외관계-여진
- 최초 등록일
- 2010.11.19
- 최종 저작일
- 2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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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참고-요약
조선과 여진과의 관계를 다각도로 기술
목차
1. 북방민족의 동향
2. 대여진정책
3. 사신의 왕래
4. 무역
5. 향화야인과 피로인 송환문제
본문내용
1. 북방민족의 동향
명의 북벌군은 원을 공격하여 그들의 세력을 소멸시키는 데 작전의 목표를 두었다. 명의 이러한 원 공격작전에 몽고인의 중국지배가 막을 내리고 이후 만리장성 이북에서 북원정권으로 얼마동안 잔명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 후 명은 요동으로 눈을 돌려 나하추를 공략하려하였다. 결국 명과 대적할 수 없음을 안 나하추는 항복하고 말았는데 이는 요동의 원나라 잔여세력이 철저히 무너졌음을 의미하였다.
원나라 멸망 후 몽고로 이동한 북원정권은 쫓겨 가는 중 원 직계의 유력한 후계자가 피살되어 사라지게 되자 몽고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쟁탈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나타난 새로운 몽고의 지배가자 ‘달단가한’ 즉 타타르다. 그 후에 여러명의 타타르가 활약하는 등의 혼란한 와중에 주변의 부족 중 오이라트가 몽고의 패권장악을 노리던 부족이 었다. 그리하여 몽고에서는 타타르부와 오이라트부가 대립하며 패권쟁탈전을 벌이는 상태가 오래 지속되었다. 결국 오이라트의 탈환이 대두하게 되었다.
탈환 사후 뒤를 이은 에센은 명이 당시 녹천의 반란을 진압하고 있는 동안 교통의 요충지인 명의 하미위를 장악할 수 있게 되어 중계무역을 독점하여 경제적 토대를 쌓았다. 이로 인해 오이라트의 요동진출이 가능해지자 명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토목의 변이 일어났다. 에센의 남침 목적은 유목국가의 충실한 건설이었으며 명을 이용하여 태태불화와의 경쟁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서였다. 토목의 변이 끝난 후 에센은 완전한 승리를 하였으나 내분이 발생하여 오이라트는 분열과 쇠퇴의 길을 걷게 되고 대신 타타르가 강성해졌다.
여진은 원대는 물론 나하추가 명에 투항하기까지 원나라의 미약한 잔여세력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정난의 역 이후 명 성조의 몽고제압정책의 일환으로 여진초무에 적극적으로 나서자 발전하기 시작했다. 여진인은 수렵과 어로 중심의 경제구조였으나 농업생산의 비중이 날로 커졌으며 사치품이 조공이나 호시를 통해 주로 중국과 교역되었다. 관문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여진부족은 지리적으로 무역에 유리하여 경제적 발전을 이룸으로써 그 세력이 강대해져 부족국가로 성장하게 되었고 조선 중기부터는 해서여진의 호륜 4국과 건주여진의 건주 3위에 의한 새로운 질서가 나타나게 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