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와 김교신을 읽고
- 최초 등록일
- 2010.11.20
- 최종 저작일
- 20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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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근대 조선은 ‘근대사회’를 통해 시도와 좌절, 그리고 식민지 지배를 경험해 왔다. 그러한 상황속에서 윤치호와 김교신은 근대사회의 서구문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넘어서려 했는지 살펴보자. 또한 우리나라가 기독교를 수용할 때, 유교적 틀 속에서 자란 그들 두 사람이 제국주의 기독교를 어떻게 해석하며, 어떻게 하나님을 이해했는지, 또 어떤 기독교 세계관을 받아들였는지 알아보자.
먼저 윤치호는 흔히 알려진 대로 초창기 유교적 세계관의 틀 속에 머물다가 훗날 일본, 중국, 그리고 미국에 유학하면서 서구 학문을 흡수한 근대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파 지식인이었다. 그가 유학을 마치고 조선의 관료가 될 때 조선의 지배를 둘러싸고 일본과 청나라가 격렬한 공방전을 벌었다. 하지만 그는 중국은 이제 ‘중화’의 중심이 아니라 두 번의 아편전쟁으로 쇄약해진 노국으로 보았다. 그래서 중국은 이제는 선진문물을 자랑하는 대국이 아닌 구미 나라들로부터 “노예와 같은 ”나라도 여겼기 때문에 조선이 청나라부터 자주독립하는 것을 최대의 정치적 목표로 두었다. 중국을 비도덕적인 국가로서 적대감을 가진 반면 미국과 일본에 대해서 호의라는 몽상적 이분 법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가 미국공사 푸트에서 통역관으로 일을 할때 문호개방을 부심하고 있던 조선정부에게 미국은 있는 힘을 다해“조선의 자주를 위해 모든 것을 돕고 나아가 조선에 대한 부당한 침략이 있을 경우”해군을 파견해서 보호 한다고 말하면서 미국의 외교 정책은“약한 것을 돕고 강한것을 억누르는”도의에 기초한다고 이해한다. 그리고 그는 서구적인 외부나 아래로부터의 구조 개혁이 아닌 왕이 주도하는 `안민의 내정 개혁`을 주하다 실패하자 1885년 망명을 겸한 유학길에 미국을 가고 싶었지만 미국행과 일본행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혐호하던 중국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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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근대 조선은 ‘근대사회’를 통해 시도와 좌절, 그리고 식민지 지배를 경험해 왔다. 그러한 상황속에서 윤치호와 김교신은 근대사회의 서구문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넘어서려 했는지 살펴보자. 또한 우리나라가 기독교를 수용할 때, 유교적 틀 속에서 자란 그들 두 사람이 제국주의 기독교를 어떻게 해석하며, 어떻게 하나님을 이해했는지, 또 어떤 기독교 세계관을 받아들였는지 알아보자.
먼저 윤치호는 흔히 알려진 대로 초창기 유교적 세계관의 틀 속에 머물다가 훗날 일본, 중국, 그리고 미국에 유학하면서 서구 학문을 흡수한 근대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파 지식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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