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에 대하여
- 최초 등록일
- 2010.11.23
- 최종 저작일
- 2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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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성균관에 대한 리포트
목차
1. 성균관의 정의
2. 성균관의 역사
3. 조선시대의 성균관
4. 성균관의 건물들
5. 성균관의 의의
6. 마치며
본문내용
1. 성균관(成均館)
조선시대 국가에서 운영한 최고의 교육기관, 오늘날의 국립대학에 해당함.
국학(國學), 태학(太學), 반궁(冸宮), 현관(賢關), 근궁(芹宮) 등으로도 불림.
성균(成均)의 뜻 : 본래 예악을 통하여 국가의 인재를 양성한다는 뜻을 내포
2. 성균관의 역사
1) 설치
고려시대 국자감(國子監) ; 992년 성조 11년→국학(國學)→성균감으로 개칭 ; 1298년 충렬왕 24년→성균관(成均館) ; 1308년 충선왕 즉위년→다시 국자감(國子監) ; 공민왕의 배원정책 때 관제의 복구로→성균관(成均館) ; 1362년 최종적으로 복구, 조선시대 이후 근대까지 사용.
성균관은 고려시대 (공민왕(恭愍王) 16년(1367) 12월에 창건) 에는 숭문관(崇文館)의 옛터에 지어졌다고 하고, 조선이 건국된 후 (1398년 태조 7년) 에는 새로운 국도의 건설과 함께 지금의 성균관 대학교가 있는 숭교방(崇敎坊)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의 옛이름) 에 위치하게 되었다.
처음 성균관에는 명륜당(明倫堂), 문묘(文廟), 동서재(同書齋), 정록청(正錄廳), 양현고(養賢庫), 식당 등 모두 96칸에 이르는 기본 건물이 갖추어지고, 이어서 문묘종사의 일을 담당하는 전사청(典祀廳), 도서관인 존경각(尊經閣) 등이 더 지어졌다.
연산군때는 성균관이 왕의 연회 장소로 사용되는 파행을 겪기도 하였으나 중종이 즉위하면서 이전의 교육기능을 다시 회복하였다. 그리고 정종 2년(1400)에 소실(燒失)되었으나, 태종 7년(1407)에 중건(重建)하고 묘정비(廟庭碑)를 세웠다. 또한, 임진왜란 때는 성균관이 거의 불타 버렸으나, 전쟁 후 1601년(선조34)에 복구되기 시작하여 1606년(인조39)까지 대성전, 문묘, 동서재, 명륜당 등의 주요 건물이 다시 세워졌다. 그 외에도 조선 후기에는 비천당(丕闡堂), 일량재(一兩齋), 벽입재(闢入齋), 계성사(棨聖祠), 육일각(六一閣) 등의 새로운 건물이 설립되어 그 규모가 더 커졌다.
참고 자료
성균관 www.skkok.com
사이버유교박물관 www.yugyo.org
개성성균관사진참조 http://blog.naver.com/one2only/80018208041
국자감 http://100.naver.com/100.php?id=22347
(재발견)한국의 문화유산 中 이순구의 “성균관”-민속원
대동문화연구제6-7집 中
고려시대 성균관의 성립과 발전”-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