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업의 건축
- 최초 등록일
- 2010.11.24
- 최종 저작일
- 20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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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건축의 거장 김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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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대표 작품
본문내용
1900년대 식민지와 6.25전쟁의 소용돌이로 인해 세계 건축의 흐름에 ‘소외’정도를 너머,‘고집으로 일관된 우리나라의 건축적 상황에서 서구의 모더니즘을 한국 건축으로 승화시킨 최초의 건축가이며자기만의 독특한 건축적 경지인 서양 건축의 한국화 혹은 한국건축의 현대화를 이룬, 한국 현대건축사에서 가장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는 건축가가 바로 김중업이다. 1922년 평양에서 5남 2녀중 차남으로 태어나, 어려서 부터 감수성이 예민하여 시와 그림에 탐닉하던 그는 그림교사의 권유로 요코하마고등학교 건축학과에 입학하여 파리 에꼴 데 보자르 출신의 나까무라 준뻬이교수 밑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고공을 졸업하고 1942년부터 일본의 한 건축사무소에 근무하다가 해방 전 귀국하여 여러 곳에서 일하며 혼란기를 보냈다. 1947년에는 서울공대 건축과 조교수가되었으나 6.25로 인해 부산 피난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문화, 예술인과 교류했고 그 인연으로 1952년 이탈리아 베니스로 건너가 르 코르뷔지에를 만나게 되었다. 그 문하에서 새로운 유럽 건축을 보고 배우게 된다. 그의 프랑스 파리, 코르뷔지에 사무소 근무는 한국 현대건축 가의 첫 유럽진출이라는 의미로도 값진 것이다. 그는 4년간 협동으로 샨디갈의 `난트 아파트`, 파리의 `브라질관` 등을 설계했다.1956년 귀국하여 홍익대 건축미술과 교수가 되었으며 건축활동도 병행했다. 1956년 한국으로 돌아온 후 자신의 사무실을 개설하면서 자신의 창조성을 보다 확대하고 미래를 향한 거대한 세계를 펼치는 작품활동을 하였으나 꼿꼿한 선비정신을 떠올리게 하는 성격, 비타협적인 작가의식때문에 군사정권과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해오다 1971년 11월 거의 반강제적으로 출국, 프랑스로 추방되어 해외에서 유랑생활을 하다가 1978년 11월 영구 귀국 했고 1988년 5월 11일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서울대 교수, 홍익대 교수, 프랑스 공인건축가, 하버드 객원교수 등을 거치면서 필그림 홀 계획안(56년), 부산대학교 본관 및 유수 대학의 건물들, 주한 프랑스 대사관(59년), 부산 충혼탑(80년)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