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식민지배와 근대화
- 최초 등록일
- 2010.12.08
- 최종 저작일
- 2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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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아프리카의 문제 중
식민지배와 근대화에 대한 찬반 의견 및 토론문
목차
1. 계기
2. 아프리카의 식민 역사
3. 긍정적인 영향
4. 부정적인 영향
5. 토론
6. 느낀점
본문내용
2. 아프리카의 식민 역사
1)유럽인의 내항(15∼18세기)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에 내항한 최초의 유럽인은 1364∼65년의 프랑스인이었다는 설이 있으나 기니라는 지명이 유럽지도에 최초로 기재된 것은 1350년 무렵이었다. 사료(史料)에 의해서 확인된 최초의 항해자는 l434년에 북위 26°의 바하도르곶(串)을 남하한 포르투갈인(人) 질에아네스이다.
교황(敎皇)이 포르투갈에 아프리카 서안의 영토권을 부여한다고 선언함으로써 포르투갈인은 항해를 계속하여 디오고캄이 71년 적도(赤道)에 도달했고, 82년에는 콩고강 하구를 발견했으며 88년 B.디아스가 희망봉을 발견했고 97년에는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우회해서 나탈에 도달하여 인도양 항로를 발견하였다. 1494년의 에스파냐.포르투갈 조약에서 에스파냐는 남북아메리카를, 포르투갈은 아프리카를 각각 독점적인 세력범위로 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16세기의 30년대 이후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덴마크 등 여러 나라의 항해가가 잇달아 아프리카 서해안에 내항하여 무역기지를 개설하였다. 이 항해가들은 처음에는 모두 금을 찾아서 내항하였으나 선적(船積)할 가치가 있는 아프리카의 산물은 상아(象牙)와 노예밖에 없었다.
네덜란드는 아프리카 무역에는 힘을 기울이지 않고, 아시아 항로의 보급기지를 확보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 밖의 나라 특히 영국은 남북아메리카와 아시아에서 유리한 식민지를 확보했기 때문에 남북아메리카의 부족한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한 노예무역을 세계적인 통상(通商)의 일환으로서 중요시하였다. 포르투갈은 기니, 앙골라, 모잠비크에서 노예무역과 그리스도교 포교를 하는 한편 해안에 영토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 밖의 나라는 1652년 네덜란드가 케이프식민지를 설치하였을 뿐 전혀 영토적인 야심을 갖지 않았다.
17세기 후반부터 성황을 이룬 노예무역 때문에 서아프리카 기니만 연안의 각지에 노예무역을 위한 성새(城塞)가 많이 구축되었으나 군인이나 무역업자가 성내(城內)에 체재하였을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