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교의 구원과 불교의 열반
- 최초 등록일
- 2010.12.08
- 최종 저작일
- 20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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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들어가는 말
상대적인 고난의 현실 안에서 꿈꾸는 절대적 미래
구원이라는 ‘동사’와 열반이라는 ‘목적어’의 차이
마무리 - ‘절대적 유(有)로 이끄는 구원’과 ‘절대 무(無)로 이해되는 열반’
본문내용
들어가는 말
솔직히 “구원”이 나에겐 막연하기만 하다.
하지만 문제는 필자가 가톨릭 수도자로 살아간다는데 있다.
수도생활을 시작한지 10년이 넘고 어느새 종신서원이란 걸 하고난 ‘수사님’이 이런 말을 하면 창피한 얘기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문제만큼은 좀 솔직해 지고 싶다. 물론 오랜 시간을 신학생으로 살아온 사람이 구원에 대한 강의라도 못하겠는가마는......! ‘깨달음’이나 ‘행복’, ‘존재에 대한 물음’은 기꺼운 반면, “구원이 무엇이고, 왜 필요한가요?”란 질문은 소홀히 여기며 살아온게 사실이다.
얼마전 가톨릭 대학에서 파악한 자료에 따르면, “교회를 다니는 이유가 무엇인가?”란 질문에 “개신교 신자들의 60%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라고 답했고, ‘구원을 얻기 위해’라고 대답한 신자는 약 20%정도였다”라고 전한다. 반면 가톨릭교회의 경우는 ‘평화 : 구원’의 비율이 “90% : 5%”였다고 한다. 통계의 정확도나 신뢰도 여부를 논하기에 앞서 가톨릭교회가 이러한 조사를 한 이유부터가 오늘의 신자들은 ‘구원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고 ‘평화라는 현실적 위안에만 만족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의 표현이라고 본다.
가톨릭 신자들이 구원문제를 회피하는 이유 중 하나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개신교인들의 모습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기도 하다. 왠지 ‘종말’이나 ‘구원’이라는 주제를 논하는 것은 고급문화의 자기네 교리에 비하면 천박한 것으로 느끼는 모양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