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화폐제도 개혁론에 대하여
여러 논문들을 종합 발췌하여 정성들여 작성한 레포트 입니다
목차
1. 김육 [金堉, 1580 ~ 1658]
2. 유형원 [柳馨遠, 1622 ~ 1673]
3. 이익 [李瀷, 1681 ~ 1763]
4. 유수원 [柳壽垣, 1694 ~ 1755]
5. 박지원 [朴趾源, 1737 ~ 1805]
6. 정약용 [丁若鏞, 1762 ~ 1836]
본문내용
조선후기 실학자의 화폐제도 개혁론
1. 김육 [金堉, 1580 ~ 1658]
인조 때부터 추진되었던 동전 유통은 호란으로 말미암아 중단된 바 있다. 김육은 쌀과 무명의 물품 화폐만 사용하고 동전을 사용하지 않아 물자가 원활히 유통되지 못하는 까닭에 정부와 민간이 모두 궁핍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청나라에 사신으로 왕래하면서 이미 동전 유통의 편리함과 유용성을 실감하였고, 개성 유수로 있을 때 물자의 활발한 유통과 동전 사용의 경제적 효과를 목격한 김육은 동전을 전국적으로 유통시키고자 하였다. 김육은 동전이 유통되면, “여행할 때는 양식을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되고, 상점 주인은 동전을 많이 얻는 것을 기뻐할 것이며, 농민은 쌀을 소비하지 않아 즐거워 할 것”이라며 그 경제적 효과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김육의 건의는 시행되지 않았다.
김육은 이에 포기하지 않고, 1650년에 다시 청나라 사신으로 다녀와 황해도와 평안도에서의 행전(行錢)을 건의하여 허락을 받는다. 그는 여비의 나머지로 중국 동전 15만 문을 사와서, 평안·안주 등 도회지에 분배하여 우선 시범적으로 사용할 것을 요청하여 효종으로부터 재가를 얻었다. 그러나 아직 벽지의 농민들은 동전 사용의 편리함을 알지 못하였다. 1654년에는 충청도 산간 지방의 농민들이 무명을 구하기 힘들어 하는 점에 착안하여 동전으로 납부하게 조치하는 등 대동법의 원활한 추진과 동전의 보급을 동시에 달성하고자 하였다. 이 정책은 당시에 화폐 대용으로 폭넓게 쓰이던 무명의 품질이 조악하기 짝이 없어 물가가 치솟는 폐단도 동시에 치유하고자 한 시책이었다. 국가가 동전을 사용하여 질 나쁜 무명을 대대적으로 거두어들이면 빠른 시간 안에 시중에는 질 좋은 무명이 유통될 것이며, 동전의 사용을 통해 물가 또한 적정한 수준에서 유지될 것이라고 본 것이었다.
참고 자료
1.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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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희남, 『정다산의 경제윤리사상』, 김영사, 2007
한국철학사연구회,『한국실학사상사』, 심산출판사, 2008
2. 논저
안병욱, “조선후기 대동론의 수용과 형성”, 한국역사연구회, 2003
윤우경, “연암 박지원의 사회·경제사상”,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1999
이훈섭, “다산정약용의 상업정책론에 관한 연구”, 한국전통상학회,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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